[설악 조오현 2주기] 스님 만나 네가지를 얻다
“스님은 위로는 국가 지도자로부터 시골 촌부에 이르기까지, 사상적으로는 좌우에 걸쳐 사람을 가리지 않고 교유했다. 때로는 가르치고 때로는 배웠으며 시대와 고락을 함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시인이기도 했던 스님은 한글 선시조를 개척하여 현대 한국문학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2019년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인북스)을 엮은 김병무·홍사성의 말입니다. 2018년 입적하신(음력 4월12일) 조오현 스님 2주기(6월 3일 신흥사에서 다례재)가 돌아옵니다. <아시아엔>은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에 실린 조오현 스님을 回憶하는 글들을 독자들께 전합니다. <편집자>
[아시아엔=오세영 예술원회원, 서울대 명예교수] 1984년의 어느 봄날 오후였을 것이다. 경복궁 동십자각 건너편, 지금은 헐려 새 건물이 들어선 한국일보사 13층의 송현클럽에서였다. 그때 나는 제4회 녹원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하였는데 식후의 간단한 연회에서 한 스님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기품이 있어 보이는 분이었다. 시조시인이자 이 상을 제정한 녹원 스님의 문도(門徒)라서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분이 바로 오현 스님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고 다른 사건이 없는 한-그때 인사를 나눈 다른 여러 스님의 경우와 같이-그저 그것으로 끝났을 일이었다. 그런데 인연의 다함에 모자람이 있었던지 그다음 해 여름방학이었다.
이 상의 운영위원이면서 내 대학의 스승이시기도 한 정한모 선생께서 한번은 나를 부르시더니 녹원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김천의 직지사에 내려가 스님께 인사도 드리고 더불어 피서 겸 물놀이를 한번 하고 돌아오자고 하셨다. 그런 전차로 선생님의 서울대 제자들 몇이 일행이 된 우리는 선생님을 모시고 직지사에 내려가게 되었는데, 바로 그 자리에 오현 스님이 동참하게 된 것이다.
가톨릭 신자로서 사찰 예절을 잘 모르시는 정 선생께서 그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굳이 오현 스님을 초청하셨으리라 짐작한다. 그날 우리 일행은 낮에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였고 밤엔 요사채에 좌정하여 시회(詩會)를 즐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오현 스님은 그 모임에서 나를 부를 때마다 꼭 ‘이 박사’라고 호칭하는 것이었다. 무슨 특별한 기억의 집착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낮에 가볍게 든 곡차 때문이었을까. 한두 번 듣다가 민망해서 내가 “스님, 저는 이가가 아니고 오가입니다”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두번 세번 정정해드려도 마찬가지였다.
나로서는 화가 날 법도 한 일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때는 그런 스님의 어투가 밉상스럽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재미있기조차 하였다. 그래서 나는 아예 이 박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그 모임을 즐겼던 것인데, 지금 돌이켜보면 스님이 무언가 나의 내심을 떠보려고 그리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떻든 지금 나는 스님 덕택으로 불가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그때 스님의 혜안이 적중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는 이때 직지사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이웃한 청암사를 들러 귀경하였다.
나로서는 이 두 번째의 만남 역시 그저 무연히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스님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듯 우리는 다시 세 번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내가 굳이 ‘그것이 스님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듯 운운’이라는 사족을 붙인 것은 그 만남을 스님이 주관하셨기 때문이다.
그 2년 후 그러니까 1987년 여름 나는 미국 체류를 준비 중이었다. 미 국무성 산하 USIA의 초청으로 아이오와대학교의 국제창작프로그램(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에 6개월 동안 참여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국을 3, 4일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스님으로부터 갑자기 의외의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스님은 내게 미국에 가는 것이 사실이냐고 확인하며 그 전에 한번 만나자고 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당시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사 뒤편에 있던 서린호텔(지금은 헐려 새 건물이 들어서 있다.) 커피숍에서 만났는데, 스님은 내가 도미할 것이라는 소문을 누구에게선가 들었다면서 당신이 과거 미국에 체류했을 때의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충고의 말씀도 주시고 더불어 내 장도를 축복해주셨다.
아, 그리고 잊히지 않은 것 하나, 내가 내겠다는 점심값을 굳이 우기고 당신이 내시더니, 막상 헤어지는 자리에서는 또 봉투까지 하나 건네주시는 것이 아닌가. 여행경비에 보태 쓰라면서···. 그때 나는 이 무렵의 스님이, 주석하는 사찰 없이 이곳저곳 만행으로 전전하는, 가난한 운수(雲水)의 신분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내심 불편한 심기가 없지도 않았다. 하지만 점심값을 내시는 기세에 눌려 그만 그 봉투까지 받아버렸다.
하여간 이런 일들이 겹쳐 이후 나와 스님과의 인연은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귀국 후 그분과 가까이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언제인가 나는 스님께 “그때 왜 저를 불러내셨습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 박사의 성격이 무던해 보여 앞으로 불가에 연이 깊을 듯’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님이 지적하신 내 성격의 무던함이란 우리의 두 번째 만남 즉 직지사에서의 1박 때 일어난 사건을 두고서 한 말씀이다. 스님으로 인해 내가 불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많다.
첫째, 불교를 지향하는 나의 시 세계가 확장되고 깊어졌다는 점이다. 내 시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스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지만 스님의 영향으로 보다 심화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 시의 불교적 측면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다른 지면에서 고백한 적이 있고 다른 많은 평론가들 또한 지적한 사항들이니 여기서 새삼 운위하지 않기로 한다.
둘째, 불가의 많은 대덕(大德)들과 교유하여 삶의 큰 교훈을 배웠다는 점이다. 셋째, 여러 불교 사찰들을 섭렵하여 내 문학의 집필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설악산 백담사, 금강산 화암사, 두타산 삼화사, 치악산 구룡사, 달마산 미황사 등이다. 넷째, 나 죽으면 그 부도(浮屠)가 백담사 경내에 서게 되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스님이 입적하면 부도는 의당 당신이 주석하던 도량에 세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인이 세울 수 있는 부도란 그 남겨진 작품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작품을 새긴 나의 시비(詩碑) 하나 이미 백담사 도량에 세워졌으니 이 어찌 예삿일이라 하겠으랴.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스님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것은 시조 창작에 대한 초발심(初發心)이다. 어느 잡지에선가 나는 미국 체류중 미국의 대학생들에게 한국문학을 소개하는 강의를 하다가 문득 민족문학으로서 시조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글을 쓴 바 있다.
앞에서 내가 언급한 아이오와대학교의 국제 창작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의 경험담이다. 귀국 후 스님께 이 일을 말씀드리자 스님은 내게 시조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시면서 꼭 한번 써 보라고 간곡히 권유하시는 것이었다. 그리해서 나는 이를 빌미로-아이오와대학의 국제 창작프로그램에서의 그 문화적 충격까지도 곁들여-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두 편씩 시조를 꾸준히 창작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모인 작품들이 어느덧 두 권의 시집으로 묶였으니 이는 오로지 스님의 은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