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현스님 1주기] “인제 용대리 주민들은 스님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모아놓은 회고담은 오현 스님이 보여준 기풍의 전모라고는 할 수 없다. 어쩌면 여러 사람이 각기 만져본 코끼리 다리에 대한 기억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책으로 엮는 것은 생전에 스님이 보여준 본지풍광(本地風光)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아직 어리석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지남(指南)으로 삼기 위해서다.” <아시아엔>은 지난해 5월 28일 열반한 조오현 스님 1주기를 맞아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인북스 2019년 5월16일 초판 1쇄 발행)에 담긴 글 일부를 독자들과 공유한다. 이 책을 엮은 김병무·홍사성 시인과 인북스 김향숙 펴낸이·김종현 주간께 감사드린다.(편집자)
[아시아엔=정래옥 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이장] 오현 큰스님과 나와의 인연은 1995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을 이장을 맡고 있었던 나는 외딴 지역에 사는 5가구의 진입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백담사를 방문하여 처음으로 큰스님을 찾아뵈었다. 마을 바로 앞 토지가 백담사 땅이었기 때문이다.
사찰 직원을 따라 스님 방에 들어가 인사를 올리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묻지도 않으시며 “그리해라. 내게는 제일 높은 분이신데.” 하시면서 차를 한 잔 따라주셨다. 그리고는 앞으로 마을과 백담사는 어떤 일이든 잘 상의해서 살아가자고 말씀하셨다. 나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백담사를 자주 찾게 되었는데, 스님은 너무도 자신을 낮추면서 늘 자상하게 대해주셨다. 스님께 큰 감화를 받아 “스님, 앞으로 저는 큰스님을 부모님처럼 모시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스님께서는 “이장하고 나하고는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되어 이제부터는 내가 이장을 친동생으로 여길 터이니 그리 알고 지내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스님과 나는 형제간처럼 생각하며 지내왔다.
스님을 처음 뵙고 난 지 10여 일이 지나 다시 백담사를 찾았을 때, 스님께서 차를 따라주시면서 “내가 사람을 시켜 이장 뒷조사를 해봤더니 이장이 돈이 없더라. 그런데도 자기 돈을 털어서 일을 보러 다니더라, 마을 일을 말이야.”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이후 나를 자주 부르셔서 적지 않은 액수의 용돈을 주셨다. 또한 명절이 다가오면 내 통장에 입금을 해 주시곤 했다. 형제 하나 없는 독자인 내게 그렇게 베풀어주시는 큰스님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함은 이루 표현할 길이 없었다. 24년이란 긴 세월 속에 너무도 많은 정이 들어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봐도 마음속으로 교감을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스님께서 떠나신 후 1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스님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돌아가셨다는 생각은 없고 어디에 잠시 다니러 떠나셨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만해마을 큰스님 계시던 방을 쳐다보면 마음이 아리고 지나간 추억에 잠기게 된다.
메주공장
2004년 어느 날,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메주공장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내가 한번 알아보겠다.” 하시더니 저녁 무렵 전화로 “이장, 메주공장 짓는 데 한 2억이면 되겠느냐”라고 물어오셨다. 나는 거기에 대한 상식도 없고 해서 “그 정도면 되겠지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알았다” 하시더니 며칠 뒤 인제군청 문화관광과에 가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메주공장은 자부담 3억을 포함 총 5억으로 완공되었다. 훗날 스님께서 “그 메주공장이 큰돈은 못 벌어도 몇 사람 밥은 먹고 살겠더라” 하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범종값과 유선TV
2007년 당시 용대 1, 2, 3리 540여 가구는 유선으로 TV를 시청하고 있었는데 선로 상태가 너무 노후되어 시청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마을 어르신들이 나에게 큰스님을 찾아뵙고 잘 말씀드려 TV를 시청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떼를 쓰다시피 하셨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스님을 뵈러 갔더니 스님께서 관리하는 사람이 없냐고 물어오셨다. 나는 가구당 5천원을 받고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렵게 살다 보니 먹고사는 데 써서 낡은 연결선이나 부스터 등을 교환하지 못했다고 말씀드렸다. 스님께서 얼마면 되겠느냐고 물으시기에 1억이 든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내가 줄 터이니 당장 시작하라” 하셔서 3개 이(里)에서 이장 포함 5명씩 추진위를 만들어서 작업을 시작하였다.
1개월여가 걸려서 새로운 업자와 계약을 체결하고 다시금 마을 전체가 TV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스님께 보고를 드렸더니 스님께서는 “내가 이장하고 약속을 했으니 백담사에 올라가 주지한테 금액을 달라고 해라. 그 돈은 내가 범종을 만들어 달려고 모아놓은 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스님이 말씀하신 대로 백담사에 올라가니 주지 스님께서 수표를 들고 나오면서 “이장님, 저기 좀 보세요”라고 말씀했다. 스님이 가리킨 곳을 보니 종각을 지어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고맙고 죄송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
해바라기밭
2017년 이른 봄, 큰스님 호출을 받고 만해마을 심우장에 갔다. 스님께서는 몇 말씀 하시다가 벌떡 일어나시며 “이장, 이리 나와 봐” 하시면서 맨발로 복도로 나가셨다. 그리곤 만해마을 건물 앞 토지를 가리키며 “올해 이장이 저기다 농사를 좀 지어라. 저 밭에다 해바라기도 심고 옥수수도 좀 심어 놓으면 오가는 관광객들도 좀 따서 먹을 수 있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알겠습니다”라고 약속을 드리고는 양구에 가서 해바라기 씨를 사 가지고 왔다. 이후 스님께서는 품삯과 비료대로 250만원을 두 번씩이나 주셨다.
시간이 흘러 가을에 접어들자 해바라기 꽃이 장관을 이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 계시던 스님께서 내려오셔서 만해마을 심우장으로 부르셨다. 스님께서는 복도로 나가자고 하시더니 “이장, 고생했다. 너무도 보기 좋구나”라고 칭찬해주셨다. 스님께서는 “다들 안 된다고 하더라. 참 말도 안 듣는다. 만해마을을 다시 뺐든지 해야겠다”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지금도 만해마을을 지날 때면 그때 생각이 나곤 한다.
마을버스
1996년 5월 말일경, 마을 주민 몇 사람과 큰스님을 뵙고 “전두환 대통령이 와서 기거 중일 때 운행하던 37인승 버스 2대가 있는데 그 버스를 마을로 주십사 하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스님께서는 “그래 알았다. 앞으로 함께 운영해보자. 지분은 6대4다”라고 말씀하셨다. “6이 어디고 4가 어디입니까?”라고 여쭈니 스님은 웃으면서 “백담사가 6이고 마을이 4다”라고 하셨다. “큰스님, 그것은 너무 과합니다. 우리는 기사 월급도 줘야 하고 고장이 나면 수리비와 유류비가 들어갈 것이니 5대5로 해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버스를 인수하여 5월 30일 법인합자회사 용대 향토기업을 설립하고 1996년 7월 13일 백담사까지 7km 전 구간을 운행하게 되었다. 무장공비 때문에 2년간은 적자 운행을 하다가 3년차부터 정상운행을 하게 되었다. 첫 마을 결산을 보고 2천만원을 싸들고 백담사로 올라가 큰스님을 찾아 인사를 드리고 돈을 드리면서 그간 운행보고를 드렸다. 큰스님은 알았다고 하면서 주지 스님을 부르시더니 그 돈을 인제군청에 장학금으로 얼마, 마을 노인회 어르신들 얼마를 드리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다 내놓으셨다.
지금은 버스가 10대로 늘어나, 여기서 생기는 돈으로 추석과 설에 마을 가구당 50만원의 성과금을 주고, 쓰레기봉투를 사서 집집이 나누어 주어 마을이 청결해지도록 하고 있다. 또한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에게 1인당 100만원씩의 장학금도 주고 마을발전기금, 불우이웃돕기 등에도 쓰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큰 스님의 도움이니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큰스님의 유지
2018년 3월 5일 아침, 큰스님께서 만해마을로 오라고 해서 노인회장님과 같이 갔다.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이제 곧 죽을 것 같다. 그동안 정래옥 이장 하고는 정이 많이 들었다. 그동안 나를 편안하게 대해 주어서 고마웠다. 내가 죽걸랑 용대리 주민장으로 해달라”라고 말씀하셨다. 스님께서는 이와 비슷한 말씀을 5년 전부터 하시곤 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큰스님,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었다.
처음 이 말씀을 하시던 5년 전 가을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고추를 따고 있는데 당시 스님을 모시고 있던 박용기 선생의 전화가 왔다. 스님을 뵙고 인사를 드렸더니 맞절을 한 뒤 “이 다음에 내가 서울에서든 용대리에서든, 죽으면 용대리 주민장으로 해줄 수가 없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큰스님, 제가 어떤 일이 있어도 주민들과 상의해서 그리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대단히 고맙다”고 하셨다. 뒤이어 내가 “큰스님, 쉽게 가시면 안 됩니다. 스님이 강녕하시고 오래도록 사셔야 군도 좋고 저희 마을도, 저도 좋습니다” 했더니 “이장, 내가 이제 나이가 많아서 죽는다. 신흥사에 가든 백담사에 가든 주지들이 힘들어한다”라고 하셨다. 내가 “그렇지 않습니다. 주지 스님들께서 큰스님을 어려워해서 그러는 것이겠지요”라고 말씀드리니 “그럴까?” 하셨다.
내가 돌아와 노인회장님을 찾아뵙고 스님의 뜻을 전해드렸더니 “여보게 이장! 그거야 당연히 그리해야지. 그동안 스님께서 우리 마을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셨나. 우리 마을이 잘살게 된 것도 스님 덕이 아닌가”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용대리 이장 3명이 만약 스님께서 돌아가시면 용대리 주민장으로 스님의 유지를 받들기로 했고, 3개 마을 주민들과도 공론화가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이날(3월 5일) 10시경, 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에 내가 “스님이 돌아가시면 불교계에서는 불교의식에 따라 장례를 치르려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스님께서 어떤 언질이라도 있어야 저희가 주장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스님께서 “그래, 종이하고 연필을 가져오너라” 하시더니 아래와 같이 ‘대한불교조계종 백담사 대중 스님들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글을 적어주셨다.
1. 내가 죽으면 시체는 가까운 병원에 기증하고 병원에서 받지 않으면 화장해서 흩뿌려라.
2. 장례는 만해마을에서 용대리 주민장으로 끝내라.
3. 염불도 하지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아라. 나는 여러분들 염불소리 듣기 싫고 제사도 먹지 않을 것이다.
4. 내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은 나의 원수다.
5. 끝으로 이 글을 유언장으로 용대리 주민 정래옥, 최영규 님에게 남긴다.
심우장에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스님은 3개 마을 이장들과 마을버스 기사들을 불러 용돈을 주시면서 격려했다. 전직 군수님이 계시는 자리였는데 당신의 장례비까지 내놓으면서 쓰고 남는 것이 있으면 장학금으로 넣으라고 덧붙이셨다. 며칠 후 스님은 나에게 노인회장을 모시고 오라고 해서 함께 심우장으로 갔다. 마을 사정을 물어본 스님은 “내가 죽으면 우리 용대리 아이들에게 누가 장학금을 주겠느냐”라면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걸 마련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그냥 하시는 말씀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더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튿날 다시 오라고 해서 노인회장님과 함께 갔더니 하나은행 통장을 꺼내어 주시면서 “이장! 이게 하나은행 통장인데 돈이 좀 들어 있다. 속초에는 하나은행이 없으니까 강릉에 가서 이채하라” 하셨다. 내가 “아니요”라고 했더니 “어서 가서 점심 먹고 갔다오라”고 하셨다. 스님의 지시대로 박용기 선생, 노인회장님이 강릉에 가서 장학금으로 쓸 돈을 노인회 통장으로 이체하고 왔다.
이후 5월 26일, 스님께서 돌아가셨고, 장례는 신흥사에서 원로회의장으로 치렀다. 큰스님의 유지를 지키지 못한 나와 주민들은 본의 아니게 스님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