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② 이홍섭 시인] 생모 마지막길 먼 발치서···

조오현 큰스님 상념에 
“여기에 모아놓은 회고담은 오현 스님이 보여준 기풍의 전모라고는 할 수 없다. 어쩌면 여러 사람이 각기 만져본 코끼리 다리에 대한 기억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책으로 엮는 것은 생전에 스님이 보여준 본지풍광(本地風光)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아직 어리석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지남(指南)으로 삼기 위해서다.” <아시아엔>은 지난해 5월 28일 열반한 조오현 스님 1주기를 맞아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인북스 2019년 5월16일 초판 1쇄 발행)에 담긴 글 일부를 독자들과 공유한다. 이 책을 엮은 김병무·홍사성 시인과 인북스 김향숙 펴낸이·김종현 주간께 감사드린다.(편집자)

[아시아엔=이홍섭 시인] 작년 6월 조오현 스님의 다비식이 끝나던 날, 나는 식은 재 앞에서 먼 훗날 스님은 어떤 모습으로 남으실까 참구해보았다. 먼 훗날에는 또 다른 모습일지 모르지만 1주기를 앞둔 지금 나에게 애잔하게 떠오르는 모습은 부끄러움 가득한 모습이다. 살아생전 스님은 늘 부끄러워하셨다. 부끄러움이 글쓰기의 동력이었고, 부끄러움이 자비의 원력이었다.

스님은 시봉하는 어린 내 앞에서도 늘 부끄러워하셨다. 겉으로는 호랑이 같으셨지만, 내면에는 부끄러움이 그득했다. 끝내 놓지 못하셨던 그 부끄러움이, 그 고뇌가 1주기를 앞둔 지금 나에게도 아프게 전해진다. 스님, 오현 스님, 스님이 가르쳐주신 그 부끄러움으로 이 거친 사바세계를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지금은 참으로 먹먹하기만 합니다. 언젠가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일러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그때까지는 이 부끄러움을 놓지 않겠습니다.

인연

설악무산 스님과의 인연은 내 나이 삼십 대 초반 초가을 어느 한 날에 맺어져, 내 나이 오십 대 중반 강릉의 한 병원 응급실까지 이어졌다. 이 질긴 인연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기자 생활이 싫어 잠시 잠적을 하였던 나에게 고 이성선 시인께서 연락을 주셨다. 내설악 백담사의 어느 스님께서 이 시인을 찾으니까 한번 뵙고 오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당시 웬 스님이 나를 찾으시나 의아해했지만, 이성선 시인의 각별한 부탁이라 거절할 수가 없어서 홀로 내설악 산길을 올라갔다. 단풍이 막 물들던 초가을 내설악은 내가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천하의 절경이었다. 당시 내설악은 지금과 다르게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아무도 오르지 않는 길을 홀로 걸어 올라가며 여기서 딱 한 철만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님을 뵙고 나서 이 한 철이 수십 철로 바뀌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시 백담사는 건물이 달랑 몇 채밖에 없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체적으로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사무장의 안내로 들어간 방 안에 한 스님이 몹시 피곤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당시 제대로 된 절도 할 줄 모르는 청맹과니였다. 스님은 나를 뻔히 보시더니 “스님한테 절할 줄도 모르노? 원래는 세번인데 빨리 한 번만 해라.”라고 말씀하셨다. 엉거주춤 절을 하고 일어나자 스님은 대뜸 “니 나하고 일 한번 안 할래?”라고 툭 던지셨다.

절은 스님들만 사는 곳인 줄 알았던 나는 금세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니 만해 스님 알제. 이제부터 내가 만해 장사를 좀 해볼라 하는데 일할 놈이 필요해서 니를 불렀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보름 정도 말미를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는 일주일 뒤에 다시 백담사를 찾았고, 스님과의 ‘만해 장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내 직책은 제3교구 소식지 <설악불교>의 주간. 백담사 중창과 ‘만해축전’뿐만이 아니라, 신흥사 본말사의 소식 전반을 사부대중과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 이 임무는 훗날 <낙산사보>를 창간해 낙산사 복원 불사를 알리는 데까지 이어졌다.

꽃밭

어느 날, 스님께서 주섬주섬 가사장삼을 챙기더니 “오늘은 좀 먼 길이다. 괜찮제? 택시 불러 놨다. 가자.”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스님과 택시에 올랐다. 여러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스님의 고향 마을이었다. 스님을 모신 지 십여 년 동안 나는 스님에게서 고향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스님의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 스님의 모친 얘기를 젊은 스님들에게 들은 적이 있다. 모친이 물어물어 아들을 찾아왔으나, 그 아들은 상좌에게 어머니를 잘 대접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끝내 도망치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스님께 언젠가 여쭤보리라 했는데 끝내 이루지 못한 터였다. 스님은 고향 변두리의 한 작은 여관을 잡았다. 그리고 짐을 풀었다. 다음날이 발인이었다.

그날 밤 스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장조카에게 시켰제.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을 꽃으로 덮으라고. 장례식장이 꽃밭이었을 거라. 내가 어머니 속을 참 많이 썩여드렸다. 너는 효도해라.” 스님은 덧붙이셨다. “시골에서는 화환이 많은 게 제일이라. 아마도 어머니가 모셔진 병원에서는 자식이 대단한 고관대작쯤이라도 되는지 알았을 끼다. 세상사란 것이 그런 거다. 저세상 가시는 날까지 화환 하나 없이 쓸쓸해서야 되겠냐. 알겠제.” 발인 날 아침 나는 서둘러 스님 방을 찾았다. 스님은 가사장삼을 갖춰 입으셨으나 끝내 일어나지 않으셨다. “가서 친척들과 울고불고 하면 뭐하겠노. 니나 가서 보고 와라.” 나는 스님께서 몰래 연락한 친척 두 분과 함께 장지가 있는 고향의 작은 마을을 찾았다. 사과밭이 유난히 많은 골짜기 마을이었다.

오현스님과 단풍, 그는 돌아갈 곳을 늘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발인장에는 장지로 함께 떠날 두 개의 화환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스님과 인연이 깊은 모 총리 출신 인사와 총무원장 스님 명의의 화환이었다. 그 두 개의 화환을 보자 장례식장을 덮었을 꽃밭이 상상이 갔다. 장지까지 따라가 마무리까지 보고 여관으로 돌아와 스님께 말씀드렸다.

“마을 입구 훤한 자리에 묻히셨습니다. 참 좋은 자리이던데요.” 나는 묘소의 위치를 상세히 말씀드렸다. “그래, 해가 잘 들어야 할 텐데. 맞은편에 사과밭이 많지? 예전부터 사과가 많이 나던 마을이었지. 참 찢어지게 가난한 마을이었는데···” 스님은 이틀 동안 음식에 입을 대지 않은 채였다. 스님은 끝내 고향 마을에 들르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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