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무산 흔적과 기억①김한수] 첫 만남부터 속임수(?)
“여기에 모아놓은 회고담은 오현 스님이 보여준 기풍의 전모라고는 할 수 없다. 어쩌면 여러 사람이 각기 만져본 코끼리 다리에 대한 기억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책으로 엮는 것은 생전에 스님이 보여준 본지풍광(本地風光)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아직 어리석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지남(指南)으로 삼기 위해서다.” <아시아엔>은 지난해 5월 28일 열반한 조오현 스님 1주기를 맞아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인북스 2019년 5월16일 초판 1쇄 발행)에 담긴 글 일부를 독자들과 공유한다. 이 책을 엮은 김병무·홍사성 시인과 인북스 김향숙 펴낸이·김종현 주간께 감사드린다.(편집자)
[아시아엔=김한수 <조선일보> 종교전문기자] “왜 그러셨을까?” 작년 5월 입적한 오현 스님을 생각하면 매번 떠오르는 궁금증이다. ‘처음 만났을 때 왜 그러셨을까?’ ‘뭐가 그리 급해서 그렇게 빨리 가셨을까?’ ‘왜 마지막 만나는 날까지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으셨을까’ 등등.
스님이 떠난 후 한동안은 ‘속았다’는 생각이었다. 첫 만남부터 입적하시기 사흘 전까지 15년간 계속 스님이 필자를 속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속았다’는 걸 계속 생각하다 보니 ‘스님은 왜 속였을까?’로 질문이 바뀌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자 ‘스님이 나를 속인 것이 아니라, 내가 속았다고 생각하는 건가?’로 바뀌었다. 그러다 결국 남게 된 의문이 ‘왜 그러셨을까?’이다. 이젠 필자에게 이 물음은 화두 아닌 화두가 됐다.
첫 만남부터 속임수(?)
스님과의 첫 만남은 2003년 늦가을이었다. 지금도 그날이 생생히 기억난다. 오후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대뜸 “○○인가?” 물었다. “아닌데요.”라고 답하니 대번에 저자세로 “아, 죄송합니다.” 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당시 필자는 외국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막 종교담당을 시작한 참이었다. 전화번호는 전임 종교담당으로부터 물려받았다.
뭔가 느낌이 있어서 다시 전화를 걸어 “저는 후임으로 종교를 담당하게 된 기자”라 설명하니 상대는 “저는 오현 스님 심부름하는 사람인데, 지금 ○○로 오시지요.”라고 했다. 회사에 전할 물건이 있다고 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승복 바지에 상의는 내의 차림인 노스님이 계셨다. “오현 스님이시죠?” 하고 인사를 드리려 했더니 “아니요, 저는 오현 스님 심부름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분명히 오현 스님이 맞아 보이는데, 너무도 태연히 아니라고 했다. 머쓱해진 필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노인’(?)이 주는 물건을 받아 신문사에 전하고는 그 일을 잊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백담사 만해마을에선 <조선일보>가 소장하던 희귀본 만해 저서를 만해문학박물관에 기증하는 행사가 있었다. 신문사 간부진이 대거 찾아갔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손님을 맞은 이는 다름 아닌 ‘그 노인’ 아닌가? 솔직히 배신감이 들었다. 아마 당시 필자의 얼굴엔 ‘아니, 도대체 왜?’라는 표정이 선명했을 것이다. 어쨌든 수십명이 모인 자리에서 따져 물을 수도 없는 형편. 대신 ‘관찰’을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스님은 손님들이 방안에 자리를 잡자마자 대뜸 ‘산’ 소주를 따시더니 반병을 글라스에 콸콸 따라서 ‘원샷’으로 마셨다.
나머지 반병도 또 글라스에 따랐다. 그리고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백담사 구경을 가자고 하셨다. 일행은 올라갈 때는 버스로, 내려올 때는 걸어서 왔다. 백담사로 올라갈 때, 백담사 경내 여기저기를 구경시켜줄 때, 하산 길까지도 스님의 손엔 소주 반병을 따른 글라스가 들려 있었다.
스님은 중간중간 글라스를 입에 가져갔다. 그러다 마침내 눈에 불을 켜고 있던 필자의 눈에 이상한 점이 포착됐다. 수시로 술잔을 입에 대는데 술잔의 수위(水位)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술 마시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그때 든 생각은 ‘아, 퍼포먼스에 강한 분인가 보다’ 하는 것이었다. 오현 스님은 첫 만남부터 강한 인상과 궁금증을 안겼다. 그렇게 15년간의 만남이 시작됐다.
“중 되고 제일 기분 좋은 날이다”
오현 스님은 만해 한용운을 오늘에 되살려낸 주인공이다. 스님 스스로는 항상 ‘만해 장사’라고 표현했지만. 중·고교를 다니면서 만해의 시 ‘님의 침묵’이나 ‘알 수 없어요’를 배우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국민에게 만해 한용운은 교과서 속에 존재하는 역사인물이었다. 스님은 만해를 역사 교과서, 국어 교과서에서 불러냈다. 매년 그의 이름으로 상을 주면서 그의 이름을 호명했다. 수상자는 국경과 종교, 인종의 구분이 없었다. 누구나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문화예술에 탁월한 업적을 냈다면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 틀을 놓은 것이 오현 스님이다.
<조선일보>는 만해축전과 만해대상이 처음 제정될 당시부터 오현 스님이 주축이 된 만해사상실천선양회와 함께 행사를 진행했다. 그 인연 때문에 조선일보 종교담당기자로서 필자는 매년 만해마을을 찾았다. 그러나 막상 오현 스님은 뵙기 어려웠다. 축전 기간이면 전국과 세계에서 몰려드는 손님들 맞이에 바빴다. 그리고 축전 행사장엔 가능한 한 나타나지 않았다. 귀빈석에는 손님들만 앉히고 자신은 행사 중간에 객석 뒤쪽에서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있어도 없는 사람 같았지만, 모든 일은 오현 스님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행사장에 나타난 그가 호통을 치면 행사장 긴장도가 급격히 상승하고 일이 팽팽 돌아갔다.
무대 뒤에서 암약(?)하던 스님은 언젠가부터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2012년 신흥사 조실(祖室)에 오른 후부터인 것 같다. 그해 신흥사 동안거 해제법문은 오현 스님의 포효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알쏭달쏭한 ‘한자 풀이 게임’이 아니었다. 자신이 만난 염(殮)쟁이 이야기였다. “늙수그레한 영감이 시신을 돌보는데, 그런 지극 정성이 없는 거야. 40년 염을 했더니 시신을 보면 그 살아온 생이 보인대.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자기 마음 편해지자고 정성을 다한다는 거야. 자기를 위한 일이지 시신을 위한 게 아니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참 부끄러웠어요. 이 사람 이야기가 대장경이구나. 생로병사, 제행무상, 화엄경, 법화경, 조사어록이 그 삶에 다 들어가 있어.”
스님은 또 “팔만대장경에 억만창생이 빠져 죽었다”며 “조사(祖師)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허우적대지 말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법문 마지막엔 앞의 말을 부정했다. “오늘 이야기는 다만 내 이야기야. 법(法)도 아니고 법(法) 아닌 것도 아니고. 여러분과 내 손금이 다르듯이, 산에 피는 꽃 색깔이 전부 다 다르듯이.”
필자는 당시 잠시 종교담당을 떠나 있었다. 현장을 다녀온 후배 기자의 기사를 보면서 ‘아, 이젠 오현 스님이 무대의 전면에 나서려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스님은 다시 무대 뒤로 돌아갔다. 가끔 서울에서 만나도 ‘절대 내 이름이 신문에 나오면 안 된다’만 거듭거듭 당부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스님은 필자에게 먹잇감을 던지기 시작했다. 주요 무대는 동안거, 하안거가 끝날 때 법문이었다.
특히 2014년 가을 백담사 기본선원 교과안거 입재식 날은 잊을 수 없다. 평소 자신과 관련된 취재는 극구 사양하던 스님이 이때는 넌지시 초대하는 것이 아닌가. 선승(禪僧)을 지향하는 출가자들이 기본 교육을 받는 기본선원을 어디에 설치하느냐는 문제는 조계종의 오랜 숙제였다. 주지 등 행정직을 맡지 않고 구름처럼 물처럼 흘러 다니며 오직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선승들을 지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선승들은 자존심 덩어리다. 또한 그만큼 까다롭다. 웬만한 절이 기본선원을 유치한다는 것은 비용은 많이 들고 표시는 별로 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기본선원은 1~2학년과 3~4학년 과정 교육이 각각 다른 교육기관(사찰)에서 이뤄지곤 했다. 기본선원 학승들은 동가식서가숙했다. 이걸 통합한 것이 무산 스님이었다. 이날 세레모니 시작 시간은 오전 10시. 필자는 그 시간에 맞춰 백담사로 바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스님은 마음이 급했다. 오전 8시쯤 인제군 원통에 도착한 필자의 전화가 울렸다.
“어디고?(어디인가요?)” “원통인데요.” “빨리 와라.” 오전 8시 30분쯤 만해마을에 도착하니 스님은 이미 교육원장 등 서울에서 내려온 스님들과 백담사로 올라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법회는 멋지게 마무리됐다. 스님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 화두에 집중하라”고 법문했다. 당시 무금선원장 신룡 스님은 오현 스님의 시 ‘침목’(枕木)을 낭송했다.
내려오는 길, 스님은 매우 흡족해했다. 혼잣말처럼 “내가 중 되고 나서 제일 기분 날이다”라고도 한 것 같았다. 만해마을에 도착해서 “아까 신룡 스님이 ‘침목’을 낭송하시던데요?”라고 여쭙자 “그래?”라며 금시초문이라는 듯 말했다. 분명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들은 자신의 시 낭송을 못 들었다는 듯이 시침을 뚝 떼시더니 “‘침목’은 내 시이지만 참 좋지” 하시더니 바로 ‘침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낭송했다.
아무리 자신의 시이지만 첫 구절부터 마지막까지 한치 오차 없이 완벽히 외는 데 놀랐다. 나중에 들으니 오현 스님은 자신의 시는 전체를 다 외고 있다 했다. 그는 “내 시는 ‘조오현’ 이름 지워놔도 내 것인 줄 다 알아볼끼다”라며 좀체 하지 않던 자랑도 하셨다. 그 무렵부터 필자는 스님의 ‘안거 해제 법어’를 들으려 백담사를 찾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이었다. 스님으로부터 느닷없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노망이 들어 무문관에 들어왔다.” 자신이 만든 백담사 무문관에 스스로 동안거 3개월 동안의 유폐에 들어간 것이다. 무문관은 알려진 대로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석달간 2~3평 작은 방안에서 혼자 생활하며 수행하는 공간이다. 세상과 통하는 길은 가로세로 30센티미터쯤 되는 ‘밥구멍’이 유일하다. 급히 전할 말이 있으면 이 밥구멍에 메모를 남겨 놓으면 전달된다.
자진해서 들어가는 독방 감옥이나 다름없다. 그 고행길을 80 노승이 자원한 것이다. 한편 놀라면서 ‘스님은 왜 그러셨을까?’ 또 궁금해졌다. 그로부터 석 달 후 2015년 3월 4일 동안거가 끝나는 날, 스님은 한결 맑은 얼굴로 나타났다. 그리고 한국 선문(禪門)에 길이 남을 명법문을 남겼다. 법문은 알쏭달쏭 퀴즈로 시작됐다.
“2005년 이후로 세계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한 말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정답은 “끊임없이 탐구하고, 끊임없이 어리석으라”는 말이었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한 명연설이었다. 이날 법문에서 스님은 스티브 잡스뿐 아니라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시나리오 작가의 수상소감 등을 종횡무진으로 인용하며 후학들의 수행을 독려했다.
그 법문을 들으면서 요즘 이야기, 서양 이야기도 얼마든지 화두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스님은 “요즘 스님들 말이, 교황님 그리고 사업가의 대학 졸업 축사나 시나리오 작가의 수상소감처럼 감동을 주거나 회자되지 못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했다. 스님은 과거의 전통에 갇혀 있는 한국불교를 탈출시키기 위해 몸소 충격 요법을 쓴 것이다. 하긴 선의 황금시대라는 중국 당송시대 선사들의 어록이 화두가 된 사연도 당시의 생활 이야기들이 아니었던가. 스님은 벽창호처럼 고집스러운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을 몸소 깨부수었던 셈이다.
이후로 스님의 사자후는 거침이 없었다. 2015년 8월 하안거 해제 법문에서는 “천 년 전 화두에 중독되지 말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배워라”고 했고, 2017년 2월 동안거 해제법문에선 “나라가 삼독(三毒)에 빠져 있다. 삼독의 불길을 잡는 사람이 대권도 잡을 것”이라고 일갈했다. 매번 안거가 끝날 무렵이면 세상의 눈길은 스님의 입으로 향하곤 했다.
종교인이 세상 흐름을 정확히 읽고, 세상살이의 기준을 제시하는 발언이었다. 그렇다고 스님이 지켜야 할 선을 넘은 적은 없다. 그래서 스님의 발언은 더욱 무거웠고 힘이 있었다. 스님의 안거 해제 법문을 들으러 가는 출장길은 매번 신이 났고 즐거웠다. 법문을 들을 때마다 속으론 스님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은근히 ‘라이벌’(?)로 생각하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필자 개인적인 생각으론 스님과 교황은 거의 같은 반열이라고 본다. 세상을 향한 고민과 연민, 사랑과 자비의 무게와 깊이가 비슷했다고 생각한다.
해제 기간엔 서울에서 뵙기도 했다. 이따금 저녁 먹고 있으면 스님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다. 극존칭으로 ‘시간 되시면 오늘 오시라’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깜짝 놀라서 ‘혹시?’ 하며 달려가 보면 정작 내용은 특별하지 않았다.
처소에 들어서면 스님은 살아오신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때로는 ‘만해 장사’ 이야기를 하실 때도 있었다. 어떤 날은 ‘5분만 더 있다가 가라’고 손을 잡을 때가 있었다. 그 ‘5분’은 30분이 되기도 했고, 1시간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더 특별한 메시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뒤늦게 지나고 보니 그런 말씀이 복인 줄 알았다.
가끔 스님께 문자를 보내 이런저런 말씀을 드리면 답은 언제나 간단했다. ‘고맙다’ ‘알았다’ 둘 중 하나였다. 2018년 1월 1일엔 아파트 단지를 산보하다가 달빛이 좋아서 사진 한 장을 찍어서 스님께 보내드렸다. 이튿날 스님이 보낸 답장이 그중 길었다. “아파트 참 좋다. 달 참 밝다. 설악무산 합장.” 그렇게 공사석에서 들은 많은 법문 가운데 필자에게 제일 기억에 남는 말씀은 이런 것이다. “세상엔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어.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모두 제 살려고 그러는 거야.”
마지막 모습
스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2018년 5월 23일, 수요일이었다. 그해 부처님오신날 직후였다. 스님은 2014년 겨울 이후로 매년 안거 기간에는 무문관에 들어가셨고, 그때도 불과 일주일 후에는 무문관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스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항상 짧았다. 마침 필자는 그해 만해축전과 만해대상 심사와 관련해 여쭤볼 겸 만해마을로 갔다.
그 전날 전화를 드렸을 때 평소와 달리 매우 반가워하셨던 점도 뒤에 생각하니 어떤 조짐이었다. 마주 앉은 스님은 그날따라 평소 안 하던 이야기를 많이 했다. ‘보고 싶은 사람들 한 10명 불러서 다 만났다’ ‘임종게도 써 놓았다’ ‘내 장례는 용대리 마을장(葬)으로 해 달라 해놨다’ 등등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또 돌아가신다는 말씀이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봄볕이 찬란했던 그날 스님은 죽음을 예감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말씀이 좀 길어지자 밖에 사람이 기다린다 했다. 백담사 셔틀버스 기사들과 용대리 주민들이라 했다. 할 수 없이 자리를 나와 면담이 끝나면 다시 뵈려고 기다렸다. 일행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만해마을 심우장에서 나왔다. 시간이 너무 늦어 다음날 뵙기로 했다.
이날 스님이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것은 “모두 다 바람에 이는 파도야”였다. 혼잣말처럼 읊었다. 당신의 시 〈파도〉의 내용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그의 눈은 감겼는지 떠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파도’의 모든 구절은 한 줄, 한 글자도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보여준 것이 임종게였다. 이제는 유명해진 “천방지축, 기고만장, 허장성세로 살다 보니/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이라는 시다. 무산 스님은 자신의 임종게를 읊어주고, 어려워 보이는 구절은 손수 해석도 해줬다.
그때는 몰랐다. 그냥 자신이 새로 쓴 시를 이야기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음 날 아침, 스님은 ‘그냥 서울로 올라가라’는 말만 전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뭔가 느낌이 달랐다.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그리고 사흘 후 스님의 부음이 전해졌다. 뒤에 들으니 스님은 그날 저녁 용대리 주민 대표와 셔틀버스 운전기사들에게 다 용돈을 주고, 당부의 말씀까지 마쳤다고 했다. 본인은 마무리를 깔끔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남들에게는 거짓말처럼 느껴졌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본심을 감쪽같이 감추고, 멋지게 세상을 속이고 홀연히 떠난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님 육성(肉聲)을 들은 건 7월 13일 강원도 속초 신흥사에서 열린 49재 때이다. “여러분은 부처가 되려고 올해 하안거에 왔습니다. 부처가 되려고 하면 부처가 안 됩니다. 부처로 살면 부처가 됩니다.” 마지막 순서에 그의 생전 육성 법문이 흘러나왔다. 법문 끄트머리엔 “이걸로 끝!”이라는 육성도 나왔다. 녹음 속 청중의 폭소가 터져나왔다. 조실(祖室)스님이 이렇게 법문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 녹음을 듣는 청중들 얼굴에도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무산 스님이 생전에 연출해 놓은 상황처럼 느껴졌다. 마치 ‘나 죽은 다음엔 울지 마라’고 일갈하는 스님을 보는 것 같았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던 것 같다. 잇따라 필자를 ‘속였던’ 스님의 뜻을. 스님은 생전에 ‘큰스님’이란 호칭을 질색했다. 대신 ‘낙승(落僧)’ 즉 ‘떨어진 중’이라 스스로 칭했다. 스님이 필자를 ‘속였던’ 모든 순간은 ‘야! 이 바보야. 큰스님 찾지 말고, 너를 찾으라’는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필자는 오현 스님에게 받은 문자메시지를 지우지 못하고 있다. ‘고맙다’-제가 고맙습니다, 스님. ‘알았다’-저는 아직도 스님이 왜 그러셨을까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앞으로도 ‘스님이 왜 그러셨을까’는 필자 삶의 화두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