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산책] 코로나시대 필독 희곡집 ‘낙하산’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2018년 11월 중순 세실극장에서 헬렌 켈러와 스승 설리반을 주제로 한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 마지막 본 연극이다. 그런 내게 7월말 희곡집이 도착했다. <낙하산-가족을 훔친 사람들>(권호웅 저, EASYCOM)이다. 일주일쯤 책상에 방치한 나는 고마움 반, 미안함 반에 페이지를 넘기고 단숨에 읽어갔다. 영화처럼 긴박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희곡집 <낙하산> 

책 제목이 된 ‘낙하산’ 등장인물들의 이름짓기부터 기발하다. 일두(가출 10대 소년), 이정(가출 10대 소녀), 삼식(30대 트럭행상), 사연(30대 삼식의 아내), 오철(60대 늙은 전과자), 육례(60대 시장 꽃행상), 서초구(30대 칠칠금고 대표), 서중구(30대 팔팔보험 대리), 서말구(30대 구구은행 대리). 희곡은 1999년 IMF 구제금융 시기 대도시 원룸아파트에서 벌어진 사건을 통해 등장인물들 심리와 언행을 좇아간다.

저자 스스로 꼽은 이 작품의 백미 대사를 따라가 보자.

육례 : 경찰이우? 옷이···.
서초구 : 좋은 질문입니다. 이 감옥 같은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갇힌 자! 또 다른 하나는 가두는 자! 전 감옥에서 하늘에 대고 맹세했습니다. 훌륭한 가두는 자가 되자! 그것이 제가 교도관 비슷한 제복을 입는 이유입니다. 참고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전 팬티도 각을 잡아 입습니다.
육례 : 그럼 금고 여는 사람이유?
서초구 : 그렇습니다. 갇힌 자는 열 수 없지만 가두는 자는 열 수 있다! 금고는 제게 있어서 곧 행복이 가득 담긴 권력을 상징합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럼 왜 권력을 갖고자 하느냐? 여기서 또다시 위대한 화두가 나옵니다. 자유! 그렇습니다. 자유란 권력을 쥔 자에게 주어지는 매력적인 월계관이자, 전리품이자 쾌락의 블랙홀!–인 것입니다. 영원히 자유롭기 위해 저는 권력을 원하고 제복을 입으며 금고를 엽니다.
오철 : 말 많은 건,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구먼.

(중략)
(일두는 생각난 듯 꼬마의 그림을 꺼낸다.)

일두 : 이 낙하산 그림. (사진을 가리키며) 저 남자, 이 그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삼식 : 글쎄···. 만약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생각을 했다면···. 아마도 자기 가족을 구원해 줄 어떤 것···.
일두 : 낙하산! 낙하산이 펴져서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을 거에요.
삼식 : 그런 마음이야 나도 간절하지. 제길할, 그러고 보니 저 남자나 나나 똑 같은 처지로군.
일두 : 참, 안됐어요.
삼식 : 아무리 그래도 죽는 건 잘못이야.
오철 : 막다른 곳에 몰리면 백지처럼 다시 되돌리고도 싶겠지. 죽지 못해 살 때는 말이야.
삼식 : 사실···. 저도 몇 번 한강에 간 적이 있어요.
오철 : (웃으며) 거 보라우.
삼식 : 그러고 보니 우린 모두 낙하산이 필요한 사람들이군요. 저 가족처럼···.

이 작품 ‘낙하산’은 1999년 대학로에서 초연됐다. 2012년 프랑스 아르마땅출판사에서 한국의 민중극시리즈 3권 중 1990년대 대표 민중극으로 선정,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필자는 이 희곡을 읽는 내내 IMF 구제금융까지 내몰렸던 20여년 대한민국 상황이 다시 벌어지면 어쩌나 하는 ‘불길한 상상’을 떨칠 수 없었다. 제발 상상으로만 머물길···.

이 희곡집 두 번째 작품은 제목부터 생소하다. 작품 ‘화기분대’(火器分隊)는 탄약고 폭발사고로 아군과 적군의 진공지역인 비무장지대로 탈영한 육군 화기분대 이야기다. 엉겹결에 선택한 턀영이지만, 그곳에서 분대원들은 진정한 자유를 맛보며 자신들의 공화국을 선포한다는 줄거리다.

‘화기분대’는 작가가 1994년 고려대 의대 연극반 정기공연의 외부연출로 갔다가 직접 창작해 대학무대에서 딱 한번 선보인 채 이후 정식 공연은 없었다고 한다. 일종의 미발표작인 셈이다.

희곡 제목도 ‘율도국을 찾아서’ ‘미완이 나라’였다가 ‘화기분대’로 최종 결정됐다. 1994년 10월 어느날 경상도 지역의 후방사단에서 육사와 ROTC 출신 소대장 2명이 탈영해 군안팎에 파문을 던진 적이 있다.

부대 사병들의 상습적·전통적인 집단구타와 이를 묵인하는 상급장교들에 항의해 두명의 초임장교들이 탈영했는데, 당시 한겨레 시경캡으로 이 사건 취재를 지휘한 필자는 ‘화기분대’를 읽으며 당시 실화였던 ‘소대장 길들이기’가 자꾸 오버랩 됐다.

희곡집 <낙하산>에는 이밖에 1920년대 민족영화 나운규의 <아리랑>을 소재로, 극단 아리랑의 창단공연 2인극 <아리랑>(원작 김명곤)을 다시 5인극으로 각색한 ‘아리랑2’와 ‘창극/불사조의 노래’가 이어진다. ‘아리랑2’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춘사 나운규라는 예술가를 통해 오늘의 시대상황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창극/불사조의 노래’는 일제강점기 인력거꾼의 딸로 태어나 전주 권번에서 소리와 기예를 배운 한 소녀가 해방과 6.25, 비련과 생활고를 이겨내고 여류명창이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권호웅 작가

한편 저자 권호웅은 1990년 연극배우를 시작으로 희곡작가, 극단 연출 및 기획자로 꾸준히 활동해왔다. 1998년 영화 시나리오 작가에 데뷔한 뒤 2002년 국립극장에서 예술행정을 맡았다. 2009년부터는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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