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언관사관’ 정신 일깨워준 천관우 선배께

1988년 폐암 수술 후 천관우 최정옥 부부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존경하는 천관우 선배님. 오늘은 선배께서 95세 생신을 맞는 날입니다. 생면부지의 후배가 오늘을 기다린 것은 선배께 감사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아울러 선배의 배필, 최정옥 사모님의 별세 소식을 고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선배님을 처음 대한 것은 1975년 7월 청계천 헌책방에서였습니다. 지금은 없어지고, 이름도 잊혀진 중고서점 책꽂이에서 책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선배께서 쓰신 <言官史官>(탐구당)였습니다. 고등학생 손바닥보다 약간 큰 소책자가 제 인생 항로를 안내했습니다. 그후 잠시 사학도의 꿈을 키우기도 했지만, 30년 넘게 언론 한길을 걷게 해준 책이 바로 <언관사관>이었습니다.

그 책에 담긴 ‘언관’과 ‘사관’의 정신은 이후 선배님의 삶에 저의 삶을 투영해 보는 거울이었습니다. 물론 부끄러움은 세월의 흐름에 비례하고 있습니다만.

생전에는 접하지 못하셨던 인터넷에는 선배님 이력을 이렇게 함축하고 있습니다.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언론인이자 사학자”

좀더 자세하게는 이렇게도 기록돼 있습니다.

천관우(千寬宇 1925∼1991). 언론인 겸 사학자. 1951년 ‘대한통신’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투신하여 한국일보, 조선일보 논설위원·편집국장을 지냈다. 1963년부터 71년까지 동아일보 편집국장·주필·이사를 역임했다. 동아 시절 박정희 군사정권하의 척박한 언론환경 속에서 후배기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고 ‘동아투위’ 활동 초기에 정신적인 지주로 70년대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5공 때인 1982년부터 1991년까지 국정자문위원과 국사편찬위원을 지냈다.

제가 선배님의 <언관사관>을 처음 만난 것은 선배께서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던 시절이었습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공채 1기로 기자생활을 하는데 이 책의 존재와 선배님의 궤적은 무척 중요한 ‘롤모델’이었습니다.

하지만 선배님 약력 맨 뒷부분에 나오는 두가지 일로 선배님을 따르던 후배들로부터 배척당하셨다는 사실을 2002년께 처음 듣고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제가 한국기자협회 회장을 맡던 때였습니다. 기자협회는 독재정권에 맞서기 위해 창립됐으며, 선배님도 중요한 역할을 하신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배님의 <언관사관>은 제게 기자란 직업은 어떤 불이익에도 할 말은 하는 선비정신과, 사실확인에 대한 투신 없이는 미미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러주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2003년 가을 충주의 9평짜리 임대아파트로 미망인 최정옥 여사님을 찾은 것도 선배님에 대한 世評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최정옥 여사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세간의 얘기들을 믿고 선배님을 제 삶에서 지워버렸을 겁니다. 천만 다행히도 사모님을 통해 항간의 평가들이 풍설이고 악의에 찬 오류들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선배님께서 전두환 정부 출범 초기인 1981년 5월 14일 민족통일중앙협의회 회장을 맡게 되면서 과거 동료들로부터 받은 질타에 대한 사모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몇몇 언론계 선배들(이라고 해도 모두 선배님께는 후배들인)의 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 여기 간단히 적고자 합니다.

“1980년 신군부 등장 후 남편(천관우)이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자 집으로 찾아오던 재야인사들의 발길이 뚝 끊겼어요. 전두환과 독대를 하고 ‘7년 단임을 꼭 한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서 입을 다문 것인데, 사람들은 ‘천관우가 돈 받고 그랬다’고 오해했어요. 남편은 사람들이 뒤에 쉽게 이야기한 것처럼 암이나 술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 10시만 되면 ‘천관우, 당신 전두환한테 얼마 받아 먹었어?’ 한마디 하고는 뚝 끊는 전화가 몇 년 계속 됐어요. 홧병으로 돌아가신 거죠.”

2003년 처음 뵌 이후 2005년과 2007년 그리고 2014년 세 차례 더 사모님을 충주 연수동 임대아파트에서 뵀을 때도 최정옥 여사님은 같은 취지의 말씀을 반복하셨지요.

그뒤 6년이 흐른 올 3월11일 예비역 장군이 선배님에 대해 쓴 글을 저희 <아시아엔> 단체 카톡방에서 올렸습니다. 이 글을 읽은 언론계 동료가 “아니 천관우 같은 분의 부인이 그렇게 어렵게…”라며 금일봉을 부쳐왔습니다. 마침 그 무렵 충주는 코로나가 급속히 퍼져 방문 일정을 미루다, 6월 20일에서야 충주 사모님 계신 곳을 찾았습니다.

아, 그런데 10분 넘게 초인종을 눌러도 인기척은 없고 옆집 사는 몸이 성치 않은 분이 문을 빼꼼 열며 띄엄띄엄 몇 마디로 사모님 별세 소식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봄.돌.아.가.셔,어,요”

이틀 뒤 동사무소에 확인해 보니 3월 8일 별세하셨다고 하더군요. 헤어진 지 30년 만에 선배님 곁으로 떠나신 거였습니다. 사모님께선 영문학도로 선배님이 1991년 1월 그 춥던 날 먼저 가신 뒤 충주로 이사했다고 합니다. 이후 문화센터 등에 출석하며 배움을 게을리 않던 분인 걸로 저는 몇 차례 만남에서 알게 됐습니다.

사모님 죽음 소식에 저는 잠시 먹먹해진 채 선배님을 떠올리고 오늘 이 편지를 쓸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존경하는 천관우 선배님. 오늘 95회 생신날 그곳에서 모처럼 두분이 오붓한 겸상을 하셨겠지요? 어쩌면 그곳에서도 코로나19에, 긴긴 장마에, 무엇보다 사실과 진실 대신 자신이 믿고 들은 대로 너무 쉽게 전달하는 이땅의 언론행태를 안타까워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겠지요. 그리고 ‘사필귀정’ 말 그대로 선배님께서 반세기 가까이 전 <언관사관>에서 쓰셨듯 사실과 진실은 반드시 살아남아 싹 틔우고 열매 맺을 거라 저는 확신합니다.

두서 없는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배 이상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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