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회 전국역사학대회와 ‘실학연구 이정표’ 천관우

천관우 선생

아래 글은 지난달 말 열린 역사학회 창립 70주년을 맞아 노관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가 다산연구소가 이메일 등을 통해 전파하는 ‘풀어쓰는 실학이야기’(제28회)로 쓴 글입니다. 이를 재구성하여 <아시아엔>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좋은 글을 쓰고 전해준 노관범 교수와 다산연구소에 감사 말씀을 전합니다. <편집자>

지난 10월말 연세대에서 역사학회 주관으로 열린 제65회 전국역사학대회 전체 주제는 ‘환경과 인간’이었다. 역사학대회는 역사학회가 진단학회와 협력하여 1958년 5월 24일과 25일 처음 개최되었다고 한다. 

전국역사학대회를 시작한 역사학회는 1952년 삼일절, 부산에서 역사학자 9인의 발기문이 나왔는데, 당시 소장학자 중심으로 결집하여 진단학회와 노소가 조화를 이루었다. 역사학회의 젊음은 단적으로 학회지 <역사학보> 제2집과 제3집에 실린 논문 ‘반계 유형원 연구’가 학회 발기인 천관우의 1949년도 학부 졸업논문이라는 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천관우는 이 논문으로 ‘군계일학’의 명성을 얻었고 해방 후 ‘실학’ 연구의 개척자가 되었다.

천관우의 ‘반계 유형원 연구’는 문제적인 논문이었다. 논문의 서두에 나와 있지만 그의 관심사는 조선과 세계사의 접합이었다. 조선이 봉건이라면 세계사는 근대이고 따라서 양자의 접합은 근대화이다. 그는 유형원의 경세론을 반봉건의 사회사상으로 이해하고 여기에 근대 지향의 내재적 계기 또는 근대 사상의 내재적 배반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논문의 부제에 적힌 그대로 ‘실학 발생에서 본 조선 사회’라는 큰 그림을 그리려는 의지가 충만했다.

천관우의 깊은 관심사는 근대화에 있었다. 실학은 그것의 부분적인 국면이었다. ‘반계 유형원 연구’가 등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갑오경장과 근대화’(1954)를 <사상계>에 기고했다. 그는 유형원과 갑오경장을 모두 아우르는 근대화를 생각했고, 이것이 한국사 시대구분론에 관한 발표(1967)에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장기간의 과도기를 설정하는 입론의 바탕이 되었다.

천관우의 표현대로라면 조선후기의 미숙한 근대적 요소와 일제 지배 하의 외견상의 근대적 요소, 그리고 일제 침략에 대한 저항 속에서 재정비되는 근대적 요소로 구성된 과도기의 근대화다. 온전한 근대화는 그후다. 이것은 조선후기 ‘근대맹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상대화에 도움이 되는 선구적인 지혜로 평가되기도 한다. 천관우의 근대화론은 그의 복합국가론과 함께 한국사를 통찰하는 흥미로운 관점이다. 천관우의 근대화론 및 복합국가론 관련하여 각각 <한국의 자주적 근대화에 관한 성찰>(이선민, 2021)과 <동아시아 담론의 계보와 미래>(백영서, 2022) 등이 참고될 것이다.

천관우에게 조선후기 실학이란 과도기 근대화의 역사적 국면이었다. 그는 ‘반계 유형원 연구’ 이래 ‘한국실학사상사’(1970)까지 계속 실학의 개념과 범위를 궁리했다. 제1회 전국역사학대회가 열린 1958년 10월 역사학회의 실학 개념 공동토론회가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조선시대 역사 문헌의 실학 용례보다는 1930년대 조선학운동의 실학 의식을 실학 이해의 우선적인 기준으로 강조하고 실학 감별의 기준으로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의 ‘개신유학(改新儒學)’을 제시했다.

이제 근대화론의 논제는 지났다. ‘환경과 인간’이라는 이번 역사학대회 논제는 현대사회를 성찰하는 새로운 이해 방식의 유학(儒學)을 소환한다. 천관우가 오늘날 환생한다면 조선과 세계사의 새로운 인식을 위해 조선후기 유학사에서 무엇을 논제로 제시할까? 단, 주의할 점이 있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논제에 종속시키는 현재주의는 근본적으로 비역사적인 사고이다. 논제의 적용과 맥락의 복원은 서로 다른 법, 논제를 휘두르는 대신 맥락을 사유하는 실사구시의 자세가 필요하다. 실학이란 본래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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