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언관’ 천관우 “역사는 어제의 언론이며 언론은 오늘의 역사”

김영삼 김대중 이희호 함석헌 양일동 등과 함께 자리한 천관우(세번째줄 맨 왼쪽)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천관우는 학자이자 언론인으로 시대의 ‘언관’(言官)이었다. 해방 직전 경성제대에 입학, 서울대 1회 졸업생이 되었다. 1949년 졸업논문으로 ‘반계 유형원 연구’를 썼는데 실학 자체가 개신유학의 선구이지만, 실학이 조선의 내재적 발전의 결과임을 밝힌 천관우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그는 경국대전과 조선왕조실록도 독파했는데 한문을 읽고 일본어도 해독할 수 있는 세대로서 과거와 현대를 잇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국어·국사 등 국학연구를 위해서는 한국, 일본, 중국의 어문 독해에 불편이 없어야 한다.

<한국사신론>을 쓴 이기백을 비롯해서 영재가 많은 서울대 1회 졸업생 중에서도 이병도는 천관우를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 격찬했다.

우리 사학이 조선 총독부 중추원 출신의 이병도를 넘어서게 된 것은 천관우 덕분이다. 천관우는 특히 가야사 연구에 성과를 나타냈는데, 광개토대왕비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조항에서 주어를 왜(倭)에서 백제로 바꾸어 일본의 한반도 경영설의 근거를 깨는 단서를 만들었다.

이 생각은 원래 이병도에서 시작되었는데 천관우는 이를 이어받아 이론을 만들었다고 한다. 천관우는 학계에 들어가지 않고 언론에 종사하면서도 고대사 연구를 계속했다. 신채호가 독립운동 중에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를 연재한 것과 같다. 인문학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다. 고대사 연구에 출중한 성과를 내고 있는 신용하는 본래 사회학자다.

천관우는 한국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거쳤는데, 신동아 주간으로 박정희의 아픈 데를 다룬 필화사건으로 최석채와 함께 동아일보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의 퇴거는 편집권이 기자에서 경영진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했다. 그는 “역사는 어제의 언론이며, 언론은 오늘의 역사”라고 하여 역사와 언론을 동일시했다. 그는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의 영향을 받았으며, 신채호와 박은식을 잇는 지사요 언론의 거물이었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서 천관우는 김재준, 이병린과 함께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0월유신 이래 천관우는 함석헌,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화투쟁의 선봉에 섰다. 전두환에 항거한 5·18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박정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은 전설과 같을 것이다.

천관우는 거구였으며 두주불사(斗酒不辭)였고 기자들에게는 대장으로 통했다. 그는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그의 면모와 기백, 글과 글씨를 기억하는 동기들은 천관우를 영웅이라고 한다. 그는 5·16 후 민정 이양으로 박정희와 결별하고 사학자와 언론의 길을 걸은 박창암 장군도 영웅이라고 부르는 분이다. 분명 두분 다 시대가 얻기 어려운 뛰어난 인물임이 분명하다.

필화사건으로 동아일보에서 물러난 이래 천관우는 고정수입이 없었다. 연금이 없는 언론인은 퇴직 이후 생활이 어렵다. 천관우는 5공에서 잠시 국토통일원 고문, 민족통일중앙협의회 회장을 지냈는데 후에 후회했다고 한다.

천관우의 미망인은 충주의 조그만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며 만년을 보내고 있다. 민주화에 참여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그중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무릇 幾何인데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인가?

천관우는 정약용과 같은 絶世의 經倫을 지닌 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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