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통사’ 쓴 민족사학자 박은식이 시진핑을 만난다면

박은식과 한국통사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상해에 머물다가 1925년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것으로 임정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고 극언하였다.

이승만이 물러난 후 임정은 대통령 서리 겸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는데 그는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제로 바꾼 후 국무령에 이상룡을 추천하여 당선시키고, 이승만의 구미위원회를 폐지하여 임정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통일시키고자 하였다.

박은식은 1859년생으로 1975년생인 이승만, 1876년생인 김구보다 한발 앞섰으며 조선에서 동명왕릉 참봉을 지냈다. 1905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애국계몽운동 기간에 그는 주로 언론으로 민중을 깨우치는데 중점을 두었다. 1898년 장지연, 남궁억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대한매일신문이 창간되자 주필이 되었다.

매일신문은 발행인 베델Bethel이 영국인으로 영일동맹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매일신문은 한일합병 후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문이 되었다가 해방 후에 서울신문이 되었다.

박은식은 나라가 망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東明聖王實記〉, 〈연개소문전淵蓋蘇文傳〉, 〈발해태조건국기建國記〉,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등을 집필하고, 1914년 이를 <한국통사韓國痛史>로 완결하였다. 박은식은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를 고구려와 발해渤海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려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러한 구도가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영양왕 시대에 편찬했다고 하는 신집新輯도 포함되지 안했다. 그러나 이는 만주 동포 사이에는 천년을 내려오던 사실史實이었다. 이는 유태인들이 모세가 이끄는 출애굽기를 사실史實로 믿는 것과 같다.

일본은 <조선통사>가 미치는 영향에 놀라 중추원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사료를 한국, 만주, 중국에서 널리 수집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만주에 영향을 미쳤고, 1931년 만주사변 후 만주국이 성립하기까지 만주는 사실상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

일본은 여기서 수집한 자료 중 식민사학을 꾸리기에 적합한 자료만 고르고 나머지는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조선사편수회는 이 작업의 실행부서였다. 실무자로 있었던 이병도는 조선인으로서 여기에 근접할 수 있는 극소수의 하나였다.

당唐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경주에 계림도독부를 두어 신라도 장악하고자 하였다. 신라의 문무왕은 당시의 세계제국 당唐과 결전을 벌였다. 당은 675년에 매초산성 전투에서 일패도지一敗塗地하여 신라와 화친을 맺고 676년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겨 한반도에서 물러갔다.

오늘날 시진핑은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라 한다. 이는 영국이 인도를 통치했다고 하여 무갈제국이 영국의 역사라고 하는 것과 같다. 물론 문명국인 영국은 이런 억지를 부리지는 않는다.

박은식의 의의는 임정에서의 역할 못지않게 한반도 역사의 재구성에 있다. 이점에서 신채호와 함께 민족사학의 선구자다. 오늘날 민족주의사학은 북한, 만주, 러시아에서 고구려사 연구의 발전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박은식이 <한국 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병항쟁을 독립운동의 큰 틀에서 연결시킨 것도 중대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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