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 창간 서재필과 한국 진보정치 선구 서민호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서재필은 1864년 전남 보성출신으로 외숙이던 참정대신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공부하였다.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김옥균,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협회 활동을 했던 개화기 초기의 애국지사다.
서재필은 의사(Dr.)이지 박사(Ph. D.)가 아니다. 반면 이승만은 1904년에 도미(渡美),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를 받은 후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Ph. D.를 받았다.
서재필은 미국 여성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귀화했다. 광복 후 서재필은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서재필이 돌아오기를 이승만이 바라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고, 본인이 이승만의 한국에 돌아가기 원하지 않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서재필은 생가가 있던 보성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데 국회의원으로 활약했던 서민호와 더불어 전남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다.
서민호는 1903년 전남 고흥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과 미국의 콜럼비아대학을 나왔는데 일제 하 호남의 지주 집안 출신으로 외국에서 공부했다. 이들이 김성수 등 국내에서 언론과 육영, 식산에 힘을 쏟았던 인사들과 더불어 해방 후 건국에 힘이 된 것이다.
해방 후 최초의 광주시장과 전남지사를 지내고 국회의원으로 거창학살사건 국회조사의원으로 활동 중 자신을 암살하려던 서창선 대위를 사살했다. 이 사건으로 복역 중 4.19혁명이 나서 석방되었다. 1951년 지리산 공비 토벌을 위해 거창에 투입된 11사단(사단장 최홍희) 9연대 3대대가 양민 학살사건을 저질렀다.
제주도 4.3사건과 같다. 국회에서는 조사단을 보냈는데 계엄 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국회조사단을 습격하는 맹랑한 사건을 저질렀다. 김종원은 자유당 시절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특무대장 김창룡과 함께 대표적인 정치군인으로 꼽힌다.
김창룡은 관동군 헌병으로서 빨갱이 잡는 선수였는데, 해방 후 특무부대장으로서 이승만의 총애를 받아 횡포를 부리다가 부하인 허태영 대령의 사주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설묘지에 묻혔다가 김대중 정부 시절 국립현충원에 이장되었다.
서민호는 자유당 시절 혁신계로서 남북교류를 최초로 주장했다. 민주사회당의 대표최고위원을 지냈는데 오늘날 진보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민주사회주의 이념을 구현코자 한 고정훈도 여기에 속한다.
총선에 민주당만이 아니더라도 범진보가 180석을 넘기면 좋겠다는 이해찬의 발언이 있었는데, 서민호와 고정훈이 생각했던 진보의 차원과 영역을 돌이켜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들은 출신이 유족한 사람들이었고 공부한 엘리트였다. 유럽의 민주사회주의 정당은 카우츠키, 베른스타인 등 지성이 키운 정당이다. 영국의 노동당도 집권한 바 있다.
이들 민주사회주의 정당과는 아주 거리가 먼 한국 좌파의 선택은 과연?
돌떵어지 김 용옥이라는 인간이,, KBS시사 토론연설에서 서재필 선생을 쳐 죽여야 할 넘이라고 갖은 쌍욕을 하고 비난을 한적이 있다..철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동연설을 하는 더러운 입에서 서재필선생은 독립자금을 자기 개인적 출세목적으로 사용하고,, 미국에서 편하게 아무것도 한게없고,, 서 재필, 이 승만, 안 창호땜에 친일 이 더 이 나라에서 판치고 살았다.. 정말 울분이 터지지 않을수 없다.. 저런 쌈마이 빡빡이 넘이 야바위꾼 수준 양아치가 서재필 선생을 깍아내려도 누구하나 반발내지 울분을 터뜨리지 않는 이런 현실이 너무 개탄 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