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숙·여연구는 왜 북한권력의 꽃바구니가 됐을까?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허헌은 1886년생으로 일제하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는 김병로와 비슷하다. 해방 후 여운형과 손잡고 건준에 참여하여 부위원장을 지냈다. 입북해서 김일성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냈는데 1951년 병사했다. 허정숙이 그의 딸이다.
이는 여운형의 여식 여연구가 북한에 있는 것과 같다. 그들이 북한에 있는 이유를 상고(詳考)해 보아야 한다.
레닌의 10월혁명은 약소국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레닌이 죽으며 스탈린을 경계했다. 당시 소련공산당의 의사결정기구는 정치국이었다. 정치국 내에서는 토론이 보장되었다. 스탈린은 서기장이었다. 서기국은 인사, 조직을 담당하는 사무국이었다. 스탈린은 오늘날 당의 실권자인 사무총장과 같다. 이를 이용해서 경쟁자였던 트로츠키에 승리하며 멕시코로 망명한 그를 도끼로 찍어 죽였다. 카메네프, 지노비에프 등도 숙청하여 정부와 군을 장악했다. 이래로 서기장 또는 제1 서기가 소련의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김일성은 레닌은 모르고 스탈린만 안다. 스탈린은 대원수로 불리었다. 김일성이 대원수라는 것은 스탈린을 모방한 것이다. 김정일은 국가원수고 이을설, 조명록 등은 조선인민군 원수다. 이는 괴링이 독일의 국가원수고 룬트슈테트, 롬멜 등은 독일군 원수였던 것을 본뜬 것이다.
1945년 10월 13일 김성주는 김일성 장군으로 인민에 소개되었다. 10월 28일 조선공산당에서 김용범을 제치고 당을 장악했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다음해에 ‘임시’를 떼었으며,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만들어 수상이 되었다.
이때까지는 절대 권력자가 아니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연안파 등이 정치적으로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에 힘입어 연안파는 김일성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일어났다. 김일성은 최현 등의 수하를 동원해서 반대파를 축출했다.
허정숙이나 여연구 등은 김일성의 절대권력에 굴종하여 살아남았다. 그들은 김일성의 졸개는 아니었으며, 레닌의 공산당을 기억했다. 중공도 주덕, 진운 등의 건국원로를 대우했다. 그러나 시진핑(習近平)은 이제 덩샤오핑(鄧小平)을 넘어서 마오쩌둥(毛澤東)에 다가서려는 기도를 하고 있다.
그들은 북한에 남아 김일성 권력의 꽃바구니 노릇이나 하며 연명했을 것이다. 역사의 아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