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리영희가 지금 살아있다면?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에드가 스노우가 1936년 延岸에 들어가 모택동, 주은래와 회견하고 저술한 <중국의 붉은 별>은 서방에 처음 알려진 중국공산당의 모습이었다. 북한 조선인민군의 연안파의 김두봉, 무정, 최창익도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중국은 청이 멸망 후 중화민국이 되었으나 군벌이 지배했다. 서양인이 기독교 군벌이라고 본 풍옥상馮玉祥, 동북의 마적 두목 장작림張作霖, 손문이 뒤를 부탁한 장개석將介石도 모두 부패했다. 이와 달리 반제·반봉건 투쟁을 내건 중국공산당의 모택동은 사범학교를 나왔고 주은래와 등소평은 프랑스를 유학을 한 인텔리였다. <중국의 붉은 별>은 서양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세계에 널리 중공을 알렸다.
1970년대 들어 한국에서 중국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이때 베스트셀러는 단연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리영희는 1929년 생 평안도 운산 출신으로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의 곤욕을 온몸으로 받은 세대다. 식민지 학생으로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노신魯訊의 아큐정전阿Q正戰의 중국이 해방되어 가는 것을 보았다.
해방 후 해양대학교를 나왔고 통신사 기자로서 세계를 호흡했지만, <모택동사상>을 쓴 김상협처럼 대학에서 중국을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중국사에 대한 그의 한계가 된다.
모택동은 중국사에 흔한 황제였다. 겉으로는 홍수전洪秀全을 표방했으나 실상은 진시황과 같았다. 주은래 역시 유능하나 승상丞相에 지나지 않았다. 1950년대 중공의 대약진운동은 참담한 실패였다. 모택동은 물론, 건국 8대 원로의 국가경영이 어리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나아가 1960년대 중반의 문화혁명은 현대판 분서갱유焚書坑儒였다.
중국에서도 1970년대는 일대 전환을 요구했다.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고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한국은 박정희의 유신체제로 숨이 막혀 가는데 세계는 급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의 멸공통일은 박정희의 7·4공동성명으로 남북관계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1974년에 나온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획기적이었다.
리영희는 <Times>나 <Guardian>도 아닌 <Independence>를 지향한 <한겨레신문>을 주도한 사람 중 하나다. 이영희가 스스로를 ‘리영희’로 부르게 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세간에 북한을 추종하지 않는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자유당 때 이승만을 리승만으로 부르기는 했지만, 그때는 맞춤법이 정리되기 전이었다. 리영희는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사>와 같은 역사의식을 제시하지는 못했으나, 민주투사로서 의식은 확고했다. 그러나 리영희는 기본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김대중 등 정치인과는 달랐다.
리영희는 독학으로 영어를 익혀 통역장교가 되었고, 미국 대학에서 영어로 강의할 수도 있을 정도로 독서와 사고의 폭이 광범위했다. 후배들은 그를 ‘사상의 은사’로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리영희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주사파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그는 1983년 한양대학교에 ‘중소문제연구소’를 만들었는데 관변 연구소와 달리 충실한 민간 공산권 연구소로서 고려대의 ‘아시아문제연구소’와 같이 선구적이며 연구의 온축蘊蓄이 깊다.
리영희는 시대를 험하게 살다간 지식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