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맹정음’ 창시자 박두성···이은상 “점자판 구멍마다 피땀 괴인 임의 정성”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한글 점자의 창안자이며 시각장애인 교육에 평생을 바친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은 1888년 강화도 교동에서 태어났다.
송암은 ‘맹인들의 세종대왕’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름은 두현이며 두성은 자이다. 본관은 무안, 호는 송암.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어의동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3년 제생원 맹아부(서울맹아학교의 전신)의 교사로 있으면서 본격적으로 맹인교육에 나섰다.
당시 일본어로 된 점자밖에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1920년부터 비밀리에 한글 점자연구에 착수했다. 1923년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7년간 노력한 끝에 1926년 이를 완성했다.
이 한글 점자는 ‘훈맹정음’이라고 불렸다. 일제의 검인정교과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어독본>을 한글 점자로 간행하여 맹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한몫을 담당했다. 장애인교육에 거의 관심이 없던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평생을 맹인교육에 전념했으며, 한국 특수교육 발전에 큰몫을 담당했다.
송암은 이동휘가 만주로 망명할 적에 “자네는 암자의 소나무처럼 절개를 굽히지 않도록 송암(松庵)이라 부르고 남이 하지 않는 사업에 평생을 바치게” 하며 지어준 호다.
박두성이 제생원 맹아부에 부임하여 우선 기초로 읽기, 쓰기, 셈이 가능하도록 구체적인 실물 또는 행동 교수기법을 실시하였다. 제생원에 부임한지 7년을 기해 한글점자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는데, 외국 점자의 기원에 알아보기 위해 루이 브라이유의 6점식 점자를 연구하였다.
루이 브라이유는 시력을 상실했는데도 1929년 만국점자의 원전인 ‘브라이유 포인트’를 발표하여 세계 맹인의 아버지로 불린다. 프랑스 국립묘지인 판테옹에 안장되었다.
박두성은 1926년 한글점자의 완성을 보게 되어 그해 11월 4일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 이름 지어 세상에 발표하였다. 연구에 착수한 지 6년7개월만이다. 세종대왕의 과학적인 한글이 배우기 쉽고, 읽기 쉬운 것처럼 송암의 한글 점자 역시 이에 못지 않게 배우기 쉽다.
박두성은 이어 성서의 점역(點譯)을 결심하였다. 송암은 정동교회에 교적을 두었으며 인천 내리교회에도 교적을 두고 시각장애인을 전도하였다. 딸 정희가 성경책을 읽으면 송암은 이를 받아서 제판기를 발로 밟으면서 찍곤 하였다.
아연판 한 장을 다 쓰고 다시 읽어 볼 때에 한 글자라도 틀린 것을 발견하면 다시 만들어야 했다. 점역된 아연판을 점자 인쇄기에 넣고 돌려서 제본될 때까지 1년 5개월, 1939년 마태복음이 완성되니 88장이나 되었다.
아연판 구멍마다 피땀 어린 박두성의 정성은 초인적이었다. 누가복음 16장을 끝으로 본인의 눈을 앓게 돼 시력이 매우 떨어진 후에도 이번에는 명심보감과 각종 의학서적 점역을 보급하였다.
장애인 자식을 내다버리기까지 하였던 때에 박두성은 한글점자의 창안과 보급, 교수방법의 기반 조성 등을 통하여 시각장애인 교육을 현대적 모습으로 완성하였다. 박두성은 투철한 교육이념과 교육방법, 평생교육의 선각자로서 그 역할이 지대하였다.
그는 끊임없는 권학정신, 생활지원을 위한 교육강화, 잠재능력 계발 등에 평생 몸과 마음을 바쳐 우리나라 특수교육사에 금자탑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박두성 서거(1963년 8월 25일) 3주년에 노산 이은상은 추모시를 썼고, 추모 시비가 서울 신교동 국립맹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다. 추모시다.
점자판 구멍마다 피땀 괴인 임의 정성
어두운 가슴마다 광명을 던지셨소.
이 아침 천국에서도 같이 웃으시리라.
남의 불행 건지려고 자기 행복 버리신 임
한숨을 돌이켜서 입마다 노래 소리
그 공덕 잊으리까 영원한 칭송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