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맹정음 창제 박두성①] 1884년 4월 강화도 교동섬에 떠오른 별
한글의 세계화 시대에 발맞추어 한글 점자도 세계로 나가게 될 것이다. 질병으로 인해, 사고로 인해 중도 실명이 나날이 늘어가니, IT 시대의 한글점자에 대한 연구는 더욱 발전해야 할 것이다. 한글 점자를 개발한 송암 박두성(1888년 4월26일~1963년 8월25일)은 2002년 문화관광부 제정 ‘이달의 문화인물’과 인천시 문화인물 1호로 선정됐다. 오는 4월 26일은 송암 탄생 134년이 되는 날이다. 이에 <아시아엔>은 ‘훈맹정음’을 창안해 시각장애인들에게 빛을 비춰준 송암 박두성의 생애를 외손녀인 유순애 배재대 명예교수의 글을 통해 되돌아본다. <편집자>
[아시아엔=유순애 배재대 명예교수, 기후연합 사무총장] 난세에는 영웅이 출현하며 암울한 시기에는 위인들이 탄생한다고 한다. 나의 외조부 송암 박두성(朴斗星)도 민족의 나날이 암울하던 시기에 빛을 밝힌 어른이다. 그는 위대한 교육자요, 위대한 기독교 신앙인이자 위대한 애국자라고 나는 감히 말한다.
송암은 일찌기 한글점자 ‘훈맹정음’을 창안하여(1926년)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으로 불리며, 평생을 시각장애인 교육에 바쳤다. 송암(1888년 4월26일~1963년 8월25일) 강화 교동도에서 나고 자랐다. ‘작은 섬에 빛나는 별’ 송암의 생애를 살펴보고자 한다.
교동도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으로 황해도 연백군을 마주보는 남쪽에 위치하며, 면적은 40.4㎢으로 작은 섬이지만,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강화도의 양사면과 내가면이 있고, 남쪽으로는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가 있다. 북쪽으로 2∼3㎞의 바다를 끼고 황해도 연백군이 있다.
교동도의 좀 높은 곳에서는 예성강 하구를 볼 수 있고, 맑은 날에는 개성 송악산도 보여 실향민들이 화개산 산정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지내는 곳이다.
교동도는 2014년 완공된 교동대교를 통해 강화도와 연결되어 있으며, 민간인출입통제구역이긴 해도 누구나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원래 교동도는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주변의 강화도나 석모도처럼 간척을 통해 이 섬들을 묶어, 본디의 4~5배 정도로 커졌다.
<삼국사기>에는 교동도 명칭이 달을참(達乙斬), 고목근(高木根), 교동(喬桐)으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달을참이란 ‘크고 높은 산이 있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고구려 때 현(縣)을 두어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하였고,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조에는 수도(개성)와 가까워 왕과 왕족의 유배지로 사용되었고, 이후 조선시대에도 연산군, 광해군 등이 유배되었다. 연산군은 교동에서 죽었다. 그 외에 임해군, 능창대군, 숭선군, 익평군, 영선군(고종의 조카 이준용), 화완옹주 등이 교동에 유배되었다. 수군의 요충지로 경기수영 예하 함선과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삼도수군통제사의 지휘에 들어가지 않는 경기, 황해, 평안 수영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교동도는 도서지방으로서는 교육문화의 수준이 높고, 한강, 예성강, 한탄강, 임진강 등이 서해바다와 합류되는 곳이어서, 어족이 풍부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경기만의 요지다. 서해안 지역에 우리나라 전체 갯벌 면적의 약 83.8%인 2079.9㎢이 분포되어 있는데, 강화도, 교동도에도 세계적인 갯벌이 펼쳐져 있다. 또 축산농가 등 오염원이 없어 맑고 깨끗한 농업용수로 농사를 지어 생산한 교동쌀이 또한 유명하다.
송암 박두성은 구한말 고종 25년(서기 1888년),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6번지, 당시의 달우물 마을에서 박기만의 6남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음력 3월 16일, 양력 4월 26일). 송암은 집에서는 두현(斗鉉)으로 불렸고 호적에는 두성(斗星)으로 올려졌다.
당시 교동은 경기도 교동군으로, 4개 면(面) 20개 리(里)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재 상룡리 516번지는 당시 동면 상방리에 속하므로, 송암의 출생지는 경기도 교동군 동면 상방리가 되겠다. 상방리는 다릿멀, 법재, 뚱구지, 숫고개, 배다리, 마빵, 북다리고개, 낭아래 등 8개 촌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송암의 생가는 다릿멀에 있다. 다릿멀은 마을 우물에 달빛이 비치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고, 우물물이 달아 단골, 단물이라고 부르다가 다릿멀로 굳어졌다고 한다.
송암의 조부(박동엽) 때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일화는 기독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영국 웨일스 장로교 선교사 토마스 목사(Reverend Robert Jermain Thomas)는 중국 상해의 사립학교 ‘앵글로-차이니즈’의 교장을 맡아줄 것을 런던 선교회 중국 지부장에게 제안받았으나, 거절하고 해외선교에 집중하고자 하였는데, 중국에서 조선인 가톨릭 신자를 만난 것을 계기로 1865년 조선에 잠입하였다.
성경을 배포하며 선교 활동을 벌이다 배가 파손된 곳이 강화 창후리 앞바다 쌍여(현재 등대가 설치됨)였다. 조난을 당한 후 달우물마을에 표착, 마침 집 근처 논배미를 둘러보던 박동엽 만호가 일행을 측은히 여겨,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고, 식량과 식수를 내어 무사히 상해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상해로 돌아간 후, 토마스 목사는 베이징에 있는 선교회 산하 학교에서 1년간 교장으로 봉직하였고, 제2차 조선 방문(1866년) 때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평양 대동강으로 들어 왔으나, 관민에게 패하여 27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 기독교사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나무위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독일인 목사 굿쯔라프(Reverend Carl Augustus Frederick Gutzlaff)가 1832년 7월 영국 무역선 로드 앰허스트호로 입국하여 선교한지 34년 후의 일이었다. 토머스 선교사를 만남으로써 일찍이 기독교를 접하고 받아들인 이 집안은 인천 내리감리교회 2대 담임 존스 목사에게 1900년 초에 세례를 받았으며, 교동 읍내리에 교동교회를 개척하였다. 송암 역시 굳건한 믿음의 기독교인으로 삶을 살았다(https://www.gordon.
edu/article.cfm?iArticleID=565&iReferrerPageID= 1676&iPrevCatID=134).
송암의 조부 박동엽(낳은 해 미상~1870.1.2. 별세) 만호(조선조 각 도의 진에서 마병과 보명을 통솔하던 종4품 무관)는 10여 척의 중선을 비롯하여 십수 척의 선박을 소유하고 있었다. 1901년 신축년에 강화도 일대에 극심한 한발로 기근이 닥치자, 교동주민의 3분의 1이 아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때 송암의 부친 박기만은 형제 박기완과 더불어 부친께 진언하여 10여척의 중선으로 호남지역에서 3500여석의 양곡을 구하여 조정에 바쳐, 수많은 기민들을 구하였다.
송암의 부친 박기만은 자식 부자이지만 평범한 농군이었으며, 그런 집안에 9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두성 또한 가난을 벗어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학구열이 강해, 낮에는 아버지를 도와 힘든 농사일에 전념하고 저녁이면 아우들을 데리고 글방에서 학문에 게으름이 없었다.
1895년 두성이 8세 되던 7월, 소학교령(小學校令)이 공포되자 신문물에 눈뜬 선각자들이 방방곡곡에 학교를 세우기 시작하였는데, 강화에는 1903년 강화진위대장으로 부임한 성제 이동휘(誠齊 李東輝)가 강화 태생 애국지사 유경근, 윤명삼 선생 등과 함께 진위대 영내에 보창학교를 설립하였다. 두성의 4형제는 남보다 먼저 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며 4년간 신교육을 받고 졸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