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맹정음’ 창제 송암 박두성-정희 부녀의 인천, 겨레 그리고 나라사랑
이 글은 훈맹정음이라고도 불리는 시각장애인용 점자를 개발한 송암 박두성 선생(1888~1963)의 딸로 인천지역에서 평생을 어린이를 돌보다 2년전 별세한 박정희 여사를 그리며 송암의 외손녀이자 박 여사의 딸 유순애 배재대 교수가 쓴 글이다. <편집자>
[아시아엔=유순애 배재대 생물의약학과 교수, 함초연구소장] “점자책은 쌓아 놓지 말고 세워서 꽂아놓아라.” 송암(松庵) 할아버지께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시면서 하신 유언의 말씀을 떠올려본다. 시각장애인들은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할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두고 “진정한 애맹(愛盲) 정신”이라고들 한다.
송암은 인천시 강화읍 교동면 상용리에서 1888년 4월 26일 9남매 맏이로 태어났다. 일제와 6·25를 겪고, 1963년 8월 25일 서거하셨으니 송암은 참 어려운 시절을 살며 빛을 발하신 분으로 생각한다. 얼마나 암울하고 힘든 세월이었을까?
할아버지는 강화도 보창학교와 한성사범(후에 서울대 사범대학에 편입됨)에서 수학하시고, 졸업 후 어의동보통학교 교사와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발령을 받으셨다. 청년기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성제 이동휘 선생께서 망명에 동행을 권유하셨으나, “대결은 행동이지만 도전은 실력배양에 있습니다. 저는 남아서 후진양성에 힘쓰겠습니다” 하고 의연히 소신을 밝히셨다 한다.
전국에서 시각장애 학생들을 모아서 입학시키고 가르치시는 일은 당시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어 말살정책을 펴는 일제에 맞서, 어찌 앞 못보는 장애자들에게 다시 일어를 배우고 일본글을 익히라 하느냐며, 맹학생들이 한국어를 쓰고 한글을 익히도록 탄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는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처럼 전국에서 모국어가 사라지고 있던 그 서슬퍼런 시절에 장애자 학교에서는 한국말과 글이 버젓이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송암은 1920년 수제자 몇 명과 함께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만들고, 1926년 11월 1일 훈맹정음을 반포하기에 이른다(송암의 한글점자는 1997년 12월 17일 국가의 시작장애인 문자로 정부가 고시함).
피지배국민은 인권조차 없는 암담한 현실일 진대, 송암의 의연함은 위대한 철인이요, 훌륭한 신앙인이며, 위대한 교육자이고 애국자였다.
필자의 어머니(박정희)는 송암 할아버지의 장녀로 태어났다. 1923년 4월 25일 출생해, 2014년 12월 3일 소천했다. 어머니는 제생원 교사들의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성장기에는 송암이 영화학교 교장 시절 기거하던 인천시 율목동 25번지에서 살았다.
송암께서 전국의 시각장애인들 누구나 쉽게 찾아오라고, 당시 일제시대엔데도 대문에 크게 태극을 그려놓은 한옥이었다. 어머니는 경성사범 심상과 시절, 일본학생 한국 학생 중 단연 수석이니, 화장실에서 불을 켜놓고 공부한다는 비아냥도 받았다 한다.
졸업 후 인천송림학교 교사를 하다가 평양으로 시집을 갔다. 시부님 유두환 목사는 독립운동을 한다고 수시로 수감되고 매 맞고 사는 형편이었다. 어머니는 평양 의전 출신의 젊은 서방님(아버지)의 월급은 타오는 즉시 빚 갚기에도 모자라는 형편이어서 식구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은 여인네들의 노력과 기지로 해결해야 했다고 말씀하곤 했다.
들에서 나물을 캐고 중국인들의 농장에 가서 감자를 사다가 열 무더기로 나누어 하나는 우리 식구가 먹고, 아홉 무더기를 팔아 사온 값을 충당하는 지극히 양심적인 좌판을 벌였다.
경성사범 졸업 시에도 국어 무용 미술 그리고 특기상을 탔던 어머니는 평양의 대동강 능라도 을밀대 등 너무 아름다운 산하를 그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어서, 달력을 손수 그림으로 만들곤 했는데, 한 달이 끝나기도 전에 평양철도병원 간호사들 사이에 달력그림 쟁탈전이 일어났다고 한다.
임신을 하고 아이를 한명씩 출산할 때는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여, 이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 그 환경을 낱낱이 그림과 글로 기록하였다. 책의 소제목은 명애, 현애, 인애, 순애 등이었다. 책에는 목차에서 무슨 콘텐츠를 담고 있는지 열거하고, 가령 너를 낳을 때의 세계정세, 너를 낳을 때의 가족들,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 애기 때의 음식, 옷, 장난감 등 각각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니, 일제와 6·25전쟁을 치르는 민초들의 삶이 그대로 서술되었다. 이는 현재 국립여성사박물관에 상설전시 중이다.
이 책은 후에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라고 하여 KBS 일요스페셜 1999년 12월 17일자로 방영된 후 여러 번 책으로 출간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절망은 없었다.
허락된 형편에서 아주 열심히들 기쁘게, 좌절하지 않고 사셨던 모습이다. 1947년 이미 사회 전체가 공산화가 된 북녘고향을 뒤로 하고, 온 가족이 어머니 친정이 있는 인천을 향해 걸어서 남하하였다. 핵가족 끼리끼리 남하하는 길은 다시 내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염려되었겠으나, 목사님 할아버지 부부와 여섯 아드님 가족이 모두 무사히 율목동 25번지에서 차례로 해후하였다. 우리 가족의 엑소더스요,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은 놀라운 은총을 이때 체험하였다.
인천은 피난민인 우리 가족을 따듯하게 품어 주었다. 피난민의 아이들은 교수와 의사, 화가, 대학총장, 장관 등 견실한 대한민국 시민으로 자랐다. 지금은 아버지 여섯 형제의 자손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지만, 모두들 율목동 25번지를 ‘우리 할아버지집’으로 부른다. 이곳에 우리 유씨 모두의 원적이 있다.
나는 율목동 25번지에서 나서 아버지께서 병원을 신축하신 화평동에서 자랐다. 화평동과 화수동 화도감리교회는 우리 가족의 고향이다. 손금처럼 지리도 훤하고, “윤회네 옆집 살던 누구말이야…” 하면 다 알아 듣는다. 어머니는 60년간 화평동을 넘어 동구까지 아니 인천의 아이들 누구라도 그림(수채화) 지도를 하셨고, 몇몇 사모님들이 힘을 모아 청년 윤학원 선생님이 어린이합창단을 지휘하도록 후원하였다.
동네 아주머니들 옷을 만들어 주고, 한 부모 아이들을 데리고 놀아주고 교육도 하셨다. 교회유치원 원장 30년, 그리고 교회학교 교사를 60년간 하면서, 수많은 사랑의 씨, 문화의 씨를 인천에 뿌렸다.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 교회의 절기는 우리 집 잔치 같았다. 무대장치를 하고 연극과 합창과 율동 등 학예회를 주관하고,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나중에 아버지께서는 교회를 지금의 멋진 새 건물로 짓는 일을 맡았다.
조용한 아버지 성품으론 놀라운 일이었다. 아버지 병원의 1번 단골환자는 길영희 교장선생님이었다. 어머니의 처녀시절을 불란서인형이었다고 회상하면서, 인중제고 교가 가사를 붓글씨로 써서 병원 벽에 붙여주기도 하셨다.
조부모님, 부모님들의 삶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하셨다는 존경과 감탄이 절로 나온다. 송암 할아버지께서 창안하신 한글점자, 식민지와 전쟁의 와중에서 출산과 양육, 또 가족의 먹고 입는 모든 것을 맡아야 했던 젊은 어머니의 육아일기 등 너무도 대단한 이노베이션이다. 어찌 보면 절망 그 자체인 상황 속에서 항상 지혜롭게 우주의 섭리를 간구하는 겸허한 삶이었다. 나도 긴 호흡으로 그 뒤를 따라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