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맹정음 창제 박두성②] 1913년 제생원에서 필생의 맹교육 첫발
한글의 세계화 시대에 발맞추어 한글 점자도 세계로 나가게 될 것이다. 질병으로 인해, 사고로 인해 중도 실명이 나날이 늘어가니, IT 시대의 한글점자에 대한 연구는 더욱 발전해야 할 것이다. 한글 점자를 개발한 송암 박두성(1888년 4월26일~1963년 8월25일)은 2002년 문화관광부 제정 ‘이달의 문화인물’과 인천시 문화인물 1호로 선정됐다. 오는 4월 26일은 송암 탄생 134년이 되는 날이다. 이에 <아시아엔>은 ‘훈맹정음’을 창안해 시각장애인들에게 빛을 비춰준 송암 박두성의 생애를 외손녀인 유순애 배재대 명예교수의 글을 통해 되돌아본다. <편집자>
신학문 교육에 눈을 뜬 송암은 소학교 졸업 후 교동에 돌아와 농사일에 종사하였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그의 꿈을 안주시킬 수 없었다. 이러는 동안 송암이 12세가 되자 사방에서 혼담이 들어와 16세 되는 제주 고(高)씨 상(賞)과 결혼했다. 송암은 16세에 딸 순희(順嬉), 21세에 장남 순동(順同)을 낳았다. 과묵하고 이념적이며 근엄한 송암은 고씨와의 혼인을 유지하지 못하고, 혼자 4남매를 키우다가, 30세에 김녕 김씨 경내(敬乃, 1893년 12월 7일생)와 재혼하였다.
1901년(辛丑年)은 교동 역사상 기억될 만한 흉년이었다. 송암이 무자생(戊子生)이니 그의 나이 14세 때였다. 그해 7월 한달 동안 비 한 방울도 오지 않았다. 10여 명 대가족의 장남 두성은 외국으로 나가 공부도 하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안 어른들께는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천으로 나가 일본행 상선을 타고 오사카에 도착, 일본인 상점에서 점원 노릇을 하며 한달 가량 머물렀다. 언어는 통했으나 일인들과는 뜻이 맞지 않고,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맏아들의 책임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교동으로 돌아온 두성은 주경야독으로 학문에 정진하던 중, 성제 이동휘의 주선으로 한성사범학교(현재의 서울대 사범대학과 경기고등학교로 나뉘어 발전함)에 입학하게 된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박두성은 곧 어의동보통학교(於義洞普通學校, 현재 효제초등학교) 훈도로 취임하였다.
송암이 23세 되던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이 발표되었다. 많은 애국지사가 해외로 망명하게 되는데 1911년 이동휘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르고 난 후 북만주로 떠나기에 앞서 두성에게 “자네도 나와 같이 떠나세” 하고 함께 떠나기를 제의했으나 두성은 “대결은 행동이지만, 도전은 실력배양에 있습니다. 저는 남아서 후배양성에 힘쓰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이동휘는 “자네는 암자의 소나무처럼 절개를 굽히지 않도록 자네의 아호(雅號)를 송암(松庵)이라 할 테니 남이 하지 않는 사업에 평생을 바치게” 하며 이별하였다.
점차 일본 세력이 판을 치는 가운데 송암은 한성사범을 졸업한 후 8년간 어의동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이 시기에 교사도 일인이 등장하고, 교육도 일본식으로 하는 등 변화가 뒤따랐다.
서울 종로구 신교동 인왕산 동쪽자락에 위치한 국립맹학교의 시작은 1910년도 제생원 맹아부였다. 제생원은 원래 조선 태조 6년(1397년) 조준의 건의에 따라 설치한 의료·의약, 특히 향약의 수납·보급과 의학교육 및 편찬사업 담당기관이었는데,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총독부에 의해 구휼기관으로 설립됐다.
이에 따라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을 위한 맹아부, 고아를 위한 양육부, 정신병 환자를 위한 의료부로 세분되었다. 그 후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국립맹아학교로 발전하였고, 1959년에는 농아학교를 분리설립 후 국립서울맹학교로 되어 오늘에 이른다. 2022년 현재 우리나라에는 13곳의 맹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일제의 손으로 한국 최초의 장애아 교육기관이 설립된 것이다. 총독부에서는 인내와 인간애가 요구되는 맹아교육에 헌신할 자격자를 물색하게 되었다. 우선 기독교 신자로서 교원자격을 갖춘 사람을 구하던 중 어의동보통학교 훈도 송암 박두성을 적격자로 판단하였다. 1913년 1월 6일 제생원 맹아부 근무 발령을 받음으로써 송암은 맹교육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러나 송암의 마음에는 일말의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교육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이 특수아 지도에 과연 자신이 적격자인가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당시 심경을 송암은 회갑연 때에 큰딸(박정희 화백)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내가 무슨 훌륭한 뜻을 품고 맹학교에 간 것이 아니라, 남의 집에 살고 있던 내게 월급에 사택까지 준다고 하니, 방 두개의 매력 때문에 가게 되었다. 나는 두 눈이 멀쩡한데도 이렇게 살기가 어려운데 앞이 안 보이는 이 아이들은 어찌할꼬… 하는 생각에 교육에 열중하게 되었다.”
정호승 시인은 ‘국립서울맹학교’란 제목의 시를 아래와 같이 지었는데, 그의 산문집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2020)에 수록되어 있다. 시각 장애가 있으면 살림을 못할까, 빨래나 집안이 깨끗지 않을까 염려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살림은 정갈하고 빨래도 깨끗하다. 장애학생들이 모여 교육을 받는 이 학교는 많은 위인을 배출하였다.
저녁을 먹고 선생님과 우리들은
인왕산 느티나무 숲속을 걸어
달빛 아래 모여 서서 달을 보았다
선생님, 달이 밝지요?
저는 저 달을 못 본 지
벌써 오 년이나 되었어요
돼지저금통을 굴려 축구를 하고
진 편이 내는 짜장면을 먹고 자던
기숙사 안방에도
달빛은 거울에 부서지는데
점자로 쓰는
사랑의 편지
점자로 읽는
어머니의 편지
어둠 속에서만 별은 빛나고
마음의 눈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눈이라고
마음의 눈으로 가장 아름다운
별을 볼 수 있다고
선생님과 우리들은 달빛 아래 모여 서서 편지를 읽으며
서울 시내 하수구에 빠지는 사람들이
멍쩡히 눈 뜬 자들이라고
까르르 웃으며 달만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