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제헌절·광복절·개천절 작사가는 사학자 ‘정인보’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정인보는 삼일절 노래 가사를 짓고 박태준이 곡을 지었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정인보는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노래도 작사했다. 그는 말하자면 조선시대 예문관 대제학이었다. 그는 본래 일제에 의한 한국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조선사연구>를 지은 사학자로 일제 하 신채호, 박은식을 계승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으로 감찰위원장이 되었으나, 정권과 맞지 않아 얼마 되지 않아 사임하였다. 정인보는 6.25전쟁 중 북한에 납북되었다.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는 방송을 믿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 잡혀 북한으로 끌려가던 아픔이 반야월이 지은 가요 ‘단장의 미아리 고개’에 오롯이 남아 있다.
북한군은 6월 28일 새벽 서울을 점령했다. 당시로서는 수도를 점령하면 전쟁은 끝이었다. 다행히 경찰은 서대문감옥에 있던 보도연맹 재소자를 처리하고 후퇴했다.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기까지 잔류시민은 공산당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히 겪었는데, 도강파와 잔류파에 갈등이 있었다. 군과 검찰, 경찰은 할 수 없이 잔류하게 된 사람들과 혐의가 있는 부역자를 가려내기에 신중을 기했다.
남북은 1965년 실록 국역을 같이 시작했으나 완간은 북한이 먼저다. 북한은 국역 실록을 영국 대영도서관 등 해외 유명 도서관에 제공했는데 1980년대에 여기에 유학한 학생들은 이것을 보고 놀랐다.
박정희는 경제개발계획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민족문화를 부활하고자 하였다. 아산 현충사를 세우고, 불국사를 중수하며, 실록 국역에 박차를 가했다. 조선은 실록을 강화 정족산, 태백산, 오대산, 무주 적상산 등 4대 사고에 보관하고 승려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북한은 적상사본을 인출해서 사회과학연구원에서 국역을 진행했다. 1948년 김구, 김규식과 함께 입북했다가 북한에 남은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총책임자였다. 북한은 당시부터 한자를 쓰지 않기 때문에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우리가 국한문 혼용으로 펴낸 실록보다 읽기에 편할 것이다.
정인보가 납북되고 많은 문장은 이은상이 지었다. 1955년 이승만이 제일 먼저 한 것이 국립묘지(서울 국립현충원)를 짓는 것이었다. 현충원에 이은상이 지은 헌사가 있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함께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영원히 보호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