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학자 신채호와 박열의 공통점은?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단재 신채호는 1870년생으로 박은식과 더불어 민족사학의 중심을 이룬다. 신채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판했다. 역사는 승자의 몫이다. 삼국사기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 중심이 되고 고구려와 백제는 주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신채호는 묘청의 난의 실패를 ‘조선역사상일천년래 일대사건’이라고 보았다. 김부식의 사대적이고 중국 의존적 사관으로 인해 조선 역사에서 만주 벌판이 역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묘청은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정신을 가진 정치가이자 승려로 개경 중심의 부패귀족으로부터 서경중심의 새로운 유신정치를 행하여 보겠다고 꿈꾸며, 칭제건원(稱帝建元)도 꾀하였다. 칭제건원은 조선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던 일이다.
신채호는 묘청의 난의 실패를 조선 역사가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한 결정적 사건으로 보았다.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에 항거하지 않고 귀순했다. 신라의 명문거족이 그대로 고려에 편입되었다. 김부식도 그 일족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를 만든 시기는 고려 건국 918년으로부터 2백년도 더 지난 1145년 인종 23년 때였으나 신라 중심의 역사관은 그대로 계승되고 있었다.
신채호가 1908년에 저술한 <독사신론>(讀史新論)은 민족사학에 입각해 저술한 최초의 한국 고대사 역사서다. 단군이 부여로, 그 다음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계승된다. 만주를 우리 영토화하는 동시에 단군시대로부터 발해의 멸망에 이르기까지를 부여족의 활동과 다른 민족과의 교섭과정으로 인식하고자 하였다.
기자조선, 위만조선에서 삼한으로 정통이 계승된 것으로 파악되던 고대사 인식체계가 근본적으로 뒤집어지게 된다. 고대사를 반도 중심으로 보던 보았던 기존의 인식체계를 만주 중심과 단군 및 부여족 중심으로 보게 된다.
1954년 이병도의 <국사대관>은 우리 역사의 기본이나 민족사학은 반영되어 있지 않다. 1959년부터 진단학회가 발간한 한국사 전 7권은 이병도 이외에 이상백, 이선근이 추가 집필하였으나, 대체의 맥락은 변화되지 않았다.
1967년에 나온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에서도 민족사학은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않다. 사학계에서는 그 후에도 새로운 논문이 많이 나왔고, 북한, 중국, 러시아 등에서의 한국사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으니 이를 반영하여 새롭게 써야 한다.
E. H. Carr가 설파하였듯,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我와 非我의 투쟁”으로 보았다. 신채호는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의 3대 영웅전을 썼으나 영웅 중심의 전근대적인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사학을 내세웠다. 독립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 3.1운동에 대해 “민중적 일치의 의거가 보였지만 폭력적 중심을 갖지 못하였다”고 비판하고, 철저한 비타협적 투쟁과 테러를 주장하였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로 아나키스트 동방연맹에도 참여하였다. 무정부주의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배자가 없는 상태를 지향하며, 근대에 이르러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의 폐해에 대한 반발로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함께 발흥하였다.
히로히토 황태자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도 아나키스트 동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