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봉과 최용건···북한현대사에서 기억해야 할 두사람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북한과 우리 한글 맞춤법은 별 차이가 없는데 이는 최현배와 김두봉이 주시경 밑에서 <조선어 사전> 편찬 말모임에서 같이 활동했기 때문이다.
김두봉은 연안파로 북한에서 활동했는데 6.25 전쟁 당시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의장이었는데 소련과 같이 명목상의 국가원수였다. 김일성은 수상이었다.
김두봉은 1889년 부산 출신이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있다가 1920년대 좌파 김원봉과 같이 활동하고, 1942년 연안에서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이 되었다. 1945년 무정, 최창익 등과 함께 북한에 들어와 김일성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노동당에서 추방되어 1960년경 死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두봉의 뒤를 이어 최고위 상임위원장이 된 최용건은 김일성파의 장로였다. 김일성이 2군 6사장(師長)으로 대대장급의 사장일 때 최용건은 연대장급의 군장(軍長)이었다. 최용건은 1946년 2월 인민군을 창건하였으며 1948년 9월 북한정권이 성립되자 민족보위상이 되었다. 6.25전쟁 초기에 군단장은 김웅과 김광협이 맡았다.
2군단이 춘천 공략의 실패로 진출이 늦어지자 김일성은 격노해 김광협을 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키고 군단장에 최현을 임명한다. 오늘의 최룡해는 최현의 아들이다. 최현은 김성주를 ‘성주’라고 불렀는데 자기들끼리는 서로 반말로 통하는 사이였다.
최현은 9.15 인천상륙 후에 유엔군 후방을 교란하는 제2전선을 형성했다.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해서 후퇴하는 북한군에 숨 쉴 틈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군이 제2전선을 형성한 것도 영향이 컸다. 미군은 북한 제2전선 부대를 ‘걷는 공수군단’으로 불러 두려워했다.
최용건은 1900년생으로 1950년 50세에 대대적 축하를 받았다. 1912년생인 김일성보다 12년이 위였지만 이런 대우를 받은 것은 김일성 이외에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은 최용건이 김일성, 김책, 최현, 김일 등 계열에서 장로적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두봉이 최고위 상임위원장에서 물러나자 최용건이 뒤를 이었다. 김정은이 최현을 장성택 같이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일성, 최용건, 김책, 최현 등은 박은식, 신채호, 안창호, 이승만, 김구보다 한세대 뒤다. 이승만 등은 조선의 양반이었고, 말과 글로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김일성 등은 민중이었으며 일본과 싸웠다. 그들은 30대였으나 중공군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 전투를 해온 역전의 전사였다.
이범석 등의 광복군이 미군 OSS의 훈련만 받다가 전투에 투입되어보지도 못하고, 일본이 항복했다. 김구가 차탄(嗟歎)한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