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분열의 시대’ 몽양 여운형이라면···.

여운형 선생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몽양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 출신이다. 1945년 8월 15일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위원장을 맡았다. 박헌영은 9월 6일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인공)으로 변화시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여기에 참가했다.

김대중의 좌익 연관설은 여기서부터 비롯되는데, 형의 영향을 받은 박정희의 좌익 연관설과도 같다. 여기의 좌익은 소련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과는 다른 것이다.

몽양은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해서 의정원 의원과 외교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 공산당에 가입했다.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이 1917년 10월(음력) 일어났으니 조선에서의 공산당 활동도 무척 일렀다고 할 수 있는데, 러시아 10월혁명이 약소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1운동 후 일본정부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간 여운형은 도쿄 제국호텔에서 내외신 기자와 각계 인사 5백명 앞에서 조선독립에 대해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다. 많은 일본 지도자들이 감명을 받고 사회의 여론이 비등하자 그를 초청한 하라내각이 사퇴했다. 여운형은 중국 난징南京의 진링金陵대학 영문과를 나와서 영어 연설에도 탁월했다.

여운형은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맡았는데,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보도에서 일장기 말소를 주도했다. 일제 압력으로 신문사가 폐간되자 사장을 사퇴했다. 1935년 조선체육회장을 맡았는데 그 자신 운동에 만능이었으며 청년들에게 운동을 통한 독립 준비를 지향했다.

일제 말 여운형은 총독부 요청으로 행정권과 치안권을 인수하고 송진우의 동참을 요청하였다. 송진우는 “충칭重慶 정부를 지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하였다. 송진우는 임정이 30년간 해외에 머물렀기 때문에 정부로 군림할 수 없으며, 많은 해외독립단체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하였다.

9월 6일 미군이 진주하자 모두가 헛것이 되고 말았다. 소련군정은 ‘이북5도 행정국’이라는 조선인에 의한 행정조직을 만들었으나, 미군은 군정 이외 한국인에 의한 일체의 정부조직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1944년 8월 건국동맹을 비밀리에 결성한다. 건준은 민족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까지 망라한 애국세력들이 뭉친 조직으로 해외 각지에 흩어진 독립운동 단체들과도 연대를 추진하였다. 해방 후 건국동맹이 건준 활동의 발판이 되어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하였다.

1947년 7월 여운형은 한지근(韓智根, 본명 이필형李弼炯)에 저격 받아 암살되었다. 같은 해 12월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가 암살되었다. 1949년 6월 26일 한국전쟁이 터지기 정확히 1년 전에 김구가 암살되었다.

이처럼 해방 후 좌우혼란기에 우리는 많은 인재와 지도자를 잃었다. 거기에 6.25가 터져 정인보 등 국보급 인재가 북한으로 납북되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양평에 몽양 여운형기념관이 세워졌다. 여운형 집안은 본래 양평에서 대지주였다. 몽양이 공산당과 연계를 가졌지만 소련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를 ‘진보적 사고를 가진 기독교인’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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