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 사회운동의 뿌리 ‘기장’과 ‘한신’의 어제와 오늘···”송창근·김재준 목사를 낳다”
[아시아엔=홍성표 한신대 겸임교수] 나는 전북 김제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내가 살던 고향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동네를 둘러싸고 있고 우리나라 최고의 곡창지대다. 동진강과 조병갑의 이야기가 있고 동학농민혁명의 녹두 장군 전봉준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내가 태어난 시절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로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일상과 놀이 속에는 아직도 일제의 언어가 통용됐다.
이러한 역사 사실 이전에 집안에 어려움이 닥친 까닭에 나는 서울로 상경하여 열악한 산업현장에 들어가야 했다. 이후 나는 고달픈 삶 속에서 노동운동과 산업선교, 그리고 앰네스티 서울지부에서 심부름을 하게 된다. 이때 진보적인 선생님들을 만나게 된다. 리영희·백낙청 교수, 송건호 선생, 한승헌 변호사, 문익환·박형규·강희남·윤현 목사, 고은 시인, 문동환 박사, 그리고 한상렬·황주석 형 등 수많은 분을 만났다.
난 사실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던 떠돌이 청년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그 격랑의 한 복판에서 혁명을 꿈꾸게 됐다. 산업현장에서 폐결핵을 앓아 두어 걸음도 걸을 수 없고 병원에도 갈 수 없는 죽음의 문턱에서 깊은 산 기도원에 들어가 3년반을 머물기도 했다.
헐떡거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무숲과 계곡과 바위 그리고 꽃과 새들과 세월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한손에 성서를 들고 바위에 무릎 꿇은 채로 하늘을 향해 생명의 의미를 기도하며 신의 살아 있음을 깊이 체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저 산 아래로 내려가라”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 나는 산을 내려와 한참 뒤 검정고시를 거쳐서 한신대에 입학했다. 한신 졸업 후 목사가 되었다.
내가 믿는 성서는 인간의 원죄와, 바울에서 어거스틴, 루터와 칼빈, 칼 바르트와 몰트만까지 인간의 타락을 언급한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어린 아이도 ‘악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원죄다. 나는 이러한 원죄에 ‘구조악’을 얘기하곤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독재와 경제독점, 그리고 사상의 독단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탐욕적일 뿐 아니라 불의와 거짓을 일삼으며 각자의 바벨탑을 쌓아 간다. 자본과 권력을 소유하고 나면 타자를 멸시하고 지배하려 든다. 이른바 갑질 욕구가 발로한다.
기독교장로회 즉 기장은 1953년 6월 10일 제38회 호헌 총회를 시작으로 한국 장로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탄생한다. 이것은 과거 선교사 중심의 한국교회가 이제는 자주적이며 진정한 선교의 협력시대를 주창하고 나섰음을 의미한다. 한국 기독교의 전래는 가톨릭은 1774년, 개신교는 100년 뒤인 1874년을 원년으로 삼는다. 한국 개신교의 시작은 일본에 유학중인 이수정 등 유학파 평신도의 성서 번역과 중국 만주 등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한문성서 쪽복음 판매자들에 의해서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성직자 중심이 아니라 평신도, 이른바 민중들에 의한 자발적 선교에서 시작된 것이다.
기장의 탄생은 민족상잔의 한국전쟁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표면적으로는 신학적 해석의 문제가 전면에 내세워졌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어용 종교정책을 따르는 선교사들과 그것에 굴복한 한국교회의 교권 및 기득권 신학의 독선 그리고 교권의 우위를 관철하고 보존하려는 과정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기장의 정신적 지주인 김재준 박사의 성서해석과 이해를 문제 삼아 그를 교단에서 治理하려는 데 대한 반작용이 역설적으로 새로운 개신교 장로교인 ‘기장’을 역사 전면에 드러나게 한 것이다. 이것이 한국기독교장로회 등장의 직접적인 배경이다.
한편 1904년 4월 승동교회에서 한신의 시작인 조선신학교가 개교된다. 기장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송창근 목사다. 송창근 목사는 신학교에서 김재준 박사를 발탁한 사람으로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 함께 유학을 한다. 당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영락교회(통합)를 설립한 한경직 목사다. 이들 세분은 모두 한신의 전신인 조선신학교 교수를 지냈다. 이 세분 중 독보적인 존재가 송창근 박사다.
물론 그가 나이가 위이기도 하지만 만일 그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지 않았다면 한국교회의 역사적 방향과 현실은 매우 달라진 모습이었을 것이다. 역사적 가정과 추리는 위험하기도 하겠지만 못내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기장 출범 이후 한신대학(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한신대)은 대한민국 개신교 역사에서 교회와 사회, 역사의 변혁을 담당하는 교회세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 때 서울대학교측이 한신대학을 단과대학으로 편입할 것을 간청하였지만 김재준 박사를 중심으로 단호히 거절하고 성직자 양성학교로 남기로 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러한 한신대학의 역할은 성서에 입각한 사회정의 실현과 독재 치하에서의 인권운동과 민주화, 분단상황 아래 평화통일, 그리고 자연과 생태계의 생명회복 등을 삶의 현장에서 벌여온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터다. 1960년대와 1970~80년대에 이르는 기장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주변부 민중의 편에 늘상 서왔다고 말할 수 있다. 저출산, 고령화, 양극화, 다문화사회에서의 노동자·농민·도시빈민 등의 권익을 대변하려는 의식과 행동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후 40년, 기장과 한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초심을 잘 지켜내고 있는가? 과거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향수에 젖어 위대한 스승들 이름만 되뇌며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