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

함석헌(왼쪽) 선생. 앞엔 장준하 선생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함석헌은 1901년생으로 평북 용천 출생으로, 동경고등사범학교와 동경제국대학에 같이 합격하고서 고등사범학교를 택한 수재였다. 일본에서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았고 성직자보다도 신자 본인의 내면의 감동을 중시하는 퀘이커 교도와 관련을 가졌다.

그의 <뜻으로 본 한국사>는 웅대한 역사철학이다. 함석헌이 한국사를 보는 대강은 신채호가 묘청의 실패를 ‘조선일천년래 일대사건’이라고 본 것과 맥락이 같다. 대륙에서 각축하며 한족을 정복하면서 중원으로 들어갔던 여진족, 거란족, 몽고족이 사라지고 없는데, 우리가 한반도에서 문화를 꽃피운 것도 다 뜻이 있어서라고 보고 한국사를 종횡으로 훑으며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그의 <씨알의 소리>는 민중을 중시하는 철학이다. 함석헌은 민주화운동의 봉화를 올린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에서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등과 함께 지도자였다. 그는 두 차례 노벨상 후보에 올랐다. 함석헌이야말로 참으로 노벨상을 받기에 걸맞은 인물이었다. 한국에서 사상가를 든다고 하면 함석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신의주 학생의거로 소련군 사령부에 체포, 50일 구금되었다. 그는 본래가 공산당과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6·25 전쟁 발발 후 남하하여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1956년 <사상계>를 시작하고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1961년 7월 5·16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5·16을 어떻게 볼까」로 박정희 정권과 투쟁을 시작, 이후 삼선개헌 반대투쟁위원회, 1976년 3월 1일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참여, 박정희 정권 항거의 주축이 되었다.

또 1979년 명동 YWCA사건으로 합수부에 연행되어 전두환 군부에 맞서 투쟁했다. 그는 독재투쟁의 화신이었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함석헌의 사상과 한국역사를 보는 시각을 정리한 것으로 1934년에서 1945년 사이에 쓴 <성서의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에서 시작한 책이다. 그 책을 쓰게 된 동기와 뜻을 그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사실의 자세한 기록은 전문가의 일이다. 그들의 역사는 사실의 역사, 기술記述의 역사, 연구의 역사다. 그러나 씨알은 그것보다도 해석의 역사, 뜻의 역사를 요구한다. 세계의 밑을 흐르고 있는 정신을 붙잡게 해주는, 어떤 분명한 주장을 가지는 말씀을 가지는 역사를 요구한다. 그리고 전문가의 사명은 마지막에 한 권의 씨알의 역사를 쓰는 데 있다. 바다같이 넓은 연구가 있어도, 산같이 쌓인 사료史料가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함석헌의 한국사를 보는 대강을 읽을 수 있는 몇 구절을 소개한다.

5천년 역사라면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고려시대에 와서 된 <삼국사기>의 몇 권이 있을 뿐이다. 삼국시대에 와서도 고구려, 신라, 백제가 제각기 모두 옛 기록이 있었다고 적혀 있으나 역사자료가 없지 않았던 모양인데, 중간에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겉으로 보면 신라와 고구려는 서로 적국이요, 이해가 서로 다르다 할 수 있으나 전 민족의 자리에서 보면 신라의 통일 사업을 고구려도 도왔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것은 고구려의 비장한 주검의 그늘 밑에서 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반도 동남방의 조그만 신라가 반도통일의 터를 닦게 된 것은 고구려가 몇백년 두고 북쪽의 침략자와 피를 흘리고 고된 싸움에 쉴 날이 없는 동안 덕택을 입어가면서 된 일이다. 신라 통일사업 절반은 고구려의 영(靈) 앞에 제물로 바쳐야 한다.

신라는 너무 과한 값을 주고 통일을 샀으나 그 통일은 참 보잘 것 없는 통일이다. 통일이 아니요, 분할이다. 이 때문에 나라 땅의 대부분을 잃고 일부분만이 남아 한국을 대표하게 되었고···.

40~50년 후에 일어난 발해는 사실상 고구려의 부흥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이 아무리 도로 일어나도 역사의 방향은 이미 달라졌다. 발해가 아무리 산동반도에 깃발을 날려보려 하고 동해 건너 일본에 화친의 팔을 내밀어 신라를 억눌러보려고 하나, 이제는 다 쓸데없다···. 발해는 수백년을 겨우 견디었으나 그 후로는 거란 여진 몽고 漢 등 민족이 연차로 들어오며 서로 싸우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묘청의 난을 신채호 선생은 ‘조선 여사 1천 년 이래의 제일 큰 사건이라고 한다.···이 난이 보통 난이 아니요, 유파儒派 대 불파佛派, 한학파 대 국풍파의 싸움으로 보는 것은 꿰뚫어본 관찰이다. 이 싸움에 묘청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긴 것은 한국역사가 보수적·속박적 사상에 정복된 원인이라고 하는 것도 옳은 말이다.

우왕 14년 단군 기원 3721년(서기 1388년) 음력 5월 23일 이날 한국 역사상에 한 큰 사건이 일어났다. 이성계가 압록강을 등지고 서서 상국上國 지경을 범하면 천자께 죄를 지어 나라와 백성에게 당장 화가 올 것이다라고 하던 날이다. 고구려가 망한 날이 민족 파산의 날이라고 한다면 이 날은 가운부흥家運復興을 시키자던 결심을 던진 날이다.

함석헌은 평양 출신이라 역사를 보는 눈이 남쪽 사람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 생각은 북한 사람 사이에 내려오던 생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서북을 홀대하던 조선 시대부터의 민중 속에 스며든 생각이다. 북한 정권이 편찬한 <조선통사>도 이런 흐름으로 되어 있다. 그에 비해 남한은 이병도의 <국사대관>에 기반을 둔 사관으로 배워왔다. 신채호의 민족사학은 뒤로 흘러 다닐 뿐이다. 남북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념, 체제 대결 이전에 이처럼 판연히 다른 역사의식이 대립하고 있다면 큰일이다.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는 남과 북의 역사학자들이 치열한 토론을 거쳐야 한다. 합의는 보지 못하더라도 상대의 입장을 알고, 그 간극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아는 것만으로 의의가 있다. 북한 학자는 근래에 한국에서 진전되고 있는 가야 역사에 대해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발해 역사와 관련한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는 남북이 받아들여야 한다.

철저한 사대주의자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一字 一句의 개정이 필요치 않은 불멸의 원전이 될 수는 없다. 그 후에 발전한 고고학, 민속학, 국어학의 발전이 포함되고, 프랑스, 러시아 등 외국 학자의 연구 성과도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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