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추어리] “문동환 목사님, 갈릴리에서 다시 뵐 그날까지···”

문동환 전 국회의원, 전두환 전 대통령, 이철용 전 국회의원. 1988년 5공청문회 <사진=SBS캡처>

[아시아엔=이철용 <어둠의 자식들> 작가, 전 국회의원]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해도 달도 별도 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비보에 온 세상이 마냥 흐느끼는 듯하다. 민주화운동의 대부, 민중운동의 선지자, 민중교육의 예언자, 물 샐 틈 없는 민주주의로 무장한 가난한 이들의 진정한 목자 문동환 목사님은 이 시대의 진정한 목회자이며 모두의 등불이었다. 서슬 퍼런 독재시대의 영웅이던 문 목사님은 산동네 판자촌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숨 쉬고 살아가는 곳이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최류탄이 난무하는 시위현장, 노동자들이 울부짖는 농성자, “나도 사람이다”라고 노상에서 절규하는 빈민들의 농성장 그리고 “유신독재 물러가라”고 외치는 시위현장 곳곳마다 어김없이 그가 있었다.

성직자 천명보다 올바른 정치인 한명의 역할이 더욱 소중하다면서 제도정치권에 과감하게 발을 들여놓은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국회 5공청문회장에서 필자가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외칠 때 뒤에서 슬며시 내 등을 토닥거려 주면서 “민중의 승리요”라고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던 문목사님이다.

문 목사님의 애제자인 고 허병섭 목사의 인연으로 1970년대 중반 뵈었는데 훌쩍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비보에 가슴이 미어진다.

갈릴리로 떠나신 문동환 목사님의 살아온 숨결과 걸어온 발자취를 보고, 듣고, 아는 대로 기억해내려 한다. 문 목사를 기록하려면 ‘수도권도시빈민특수선교회’의 활약과 광주대단지사건 전후의 빈민역사를 더듬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산업화와 그에 따른 도시화, 실향민·농민·화전민·화재민·빈민·이농민 등 ‘民’자 돌림의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전 국민의 4분의 1이 도시로 밀려들어 서울은 초만원이었다. 비대해진 도시화만큼 농촌은 시들었고, 산동네·하천변·구릉지 등은 이농민·빈민들로 빼곡히 점령당했다. 도시는 실업 문제로 불거졌다. 도시빈민의 삶은 깊은 가난에 젖어들었고, 시든 꽃처럼 메말라갔다.

광주대단지(현 성남시) 참상은 사람이 견디기 힘든 극한상황에서 터져나왔다. 삶의 터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진흙탕범벅 땅이었다. 학교, 병원, 약국 등은 바라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상하수도 등 생활기반 시설이 전무한 곳으로, 서울시는 철거민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사건이 일어났는데, 원인은 한마디로 피도 눈물도 없는 군사정권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행정집행이었다. 극한상황에 내몰린 빈민들의 생존권투쟁 사건인 광주대단지사건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양심 있는 성직자, 지식인 등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가난한 이웃들의 목소리도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다.

경기도 광주군에 내버려진 수만명의 빈민들이 공권력을 해체시킨 채 도시를 점거했던 사건은 빈민역사에 한 획을 긋는 생생한 기록이다. 세월이 많이 지난 이야기라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 상식적으로 납득이 잘 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보충 설명을 드리자면 당시의 광주대단지는 몸을 가눌 집은 고사하고 상하수도, 도로, 전기 등 생활기반 시설이 전무한 비탈길 벌판이었다. 천막, 움막 등 얼기설기 겨우 몸을 피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광주대단지 사건이 일어난 뒤 대책 없이 철거를 감행하고 강제로 이주시킨 무대책 횡포가 잠시 줄어드는가 싶었는데 서울시는 신설동 4번지(필자의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의 주 무대) 판자촌을 도시미관 정비라는 구실로 또다시 철거용역꾼들을 투입하여 새벽에 기습적으로 철거했다.

박형규 목사가 대표로 있던 ‘수도권도시빈민특수선교회’의 권호경, 김동환(고인), 이규상, 이해학, 허병섭(이상 목사), 손학규(정치인) 그리고 필자 등이 청계천변, 중량천변, 하월곡동, 마천동, 양동 등에 몰래 들어가 빈민선교 활동을 펼쳤다. 몰래 들어간 까닭은 툭하면 간첩으로 몰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빈민현장을 누비는 목사님들과 자주 만나면서 친분을 쌓아갔다. 필자에게 영향을 주고 이끌어 준 허병섭 목사 소개로 문동환 목사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처음 뵙던 곳은 수유동 ‘새벽의집’ 간판이 걸려있는 집이었다. 1975년 여름이다. 문 목사님은 키도 훤칠하고 얼굴은 인자해 보이면서 카리스마가 넘쳤다. 마피아보스 기질도 있어 보였다.

살가우면서도 사람을 압도하는 목소리가 믿음을 더욱 갖게 했다. 문 목사님을 만나러 가기 전 허 목사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어 대충은 짐작했지만 막상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참 멋있는 분’임을 강하게 느꼈다. 미국선교사가 서툰 한국말로 설교할 때 발음하는 특유의 발성이 문 목사님 말에서 전해졌다. 살짝 웃음도 나왔으나 꾹꾹 눌러 참았다. 영어를 심하게 쓰기에 필자는 혼잣말로 “영어가 많이 고프신가?”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문 목사님은 미국에서 오랜 생활을 하셨고, 부인도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문동환 목사님을 뵐 때마다 받은 느낌은 순수하고 거침없는 매너가 참 좋았다. 뵐수록 믿음이 더욱 깊어갔다. 당시 문동환 목사님은 빈민선교 활동에 대해 긴 시간 조언을 해주셨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라. 민중 속으로 들어가 몸과 맘을 모아 민중을 섬기고, 진정으로 그분들을 마음 속에 영접하라. 내가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한다. 민중을 먼저 섬기고 겸손하게 영접하라. 민중을 깨우치게 하되 그분들을 교육 시킨다는 건방진 생각은 하지마라. 그분들 스스로가 깨달도록 길을 예비해 드려라. 겸손히 섬기고, 민중 즉 그분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게 하라. 민중운동 하는 사람들은 앞에 나서지 말고, 민중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겸허하게 예비해주는 임무만 수행하라. 자신들의 문제는 자신들 스스로가 해결하도록 인내를 갖고 지켜봐야 한다. 민중을 지도하겠다, 교육시키겠다는 발상은 독선이고, 교만이고, 무지다. 책상운동과 현장운동은 완전히 다르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현장운동이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라. 민중이 살고 있는 현장으로 들어가 섬기다 보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문 목사님은 유난히 “스스로 말하게 하라”고 자주 조언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것이 문목사님의 가치이고, 신앙이고, 신념이고, 믿음이었다. 문 목사님과 만남이 늘어나면서 이분은 ‘살아있는 근현대박물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 목사님 부친이신 문재린 목사, 어머니 김신묵 권사, 형님 문익환 목사와 그의 부인 박용길 장로를 두루두루 만나면서 굉장한 가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북간도 명동촌에서 독립신문 기자로 목회자로 활동하신 문재린 목사님은 얼굴만 뵈어도 마음이 따듯해짐을 느꼈다. 인자하고, 조용하고, 자신을 내세우거나 주장하지 않았지만 표정만으로 어짐과 덕 그리고 믿음이 충만하게 느껴졌다. 문 목사님의 형님 문익환 목사님을 만나 뵌 것은 몇달의 시차를 두고서였다. ‘살아있는 근현대박물관’ 집안의 큰 어른들을 만나는 것도 행운인데, 좋은 말씀과 위로와 격려 그리고 과분한 칭찬까지 받았다.

문익환 목사님은 필자의 작은 아들 ‘이정국’의 이름을 지어주셨다. 이름을 지은 자초지종은 이렇다. 박형규 목사님이 먼저 지어주신 큰아들 이정민은 ‘정의로운 민중’ ‘정의와 민주’의 뜻을 담아 지으셨다. 문익환 목사님은 “정의와 민중이 정의로운 국가를 만든다”고 말하면서 ‘이정국’ 이름을 주셨다.

문동환 목사님과 만나는 회수가 잦아진 연유는 1975~1992년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중랑천변 판자집과 무허가 건축물을 강제철거하는 현장에서 필자가 활동한 덕이었다. 필자는 철거된 을씨년스런 중랑천 뚝방 위에 철거민들을 모아 교회를 설립하는데 앞장섰다. ‘사랑방교회’였다. 필자가 국민투표 부정을 폭로했다는 죄로 징역을 살다나온 지 한달도 되지 않았던 시기에 강제철거가 집행됐다. 징역을 사는 동안에 <꼬방동네 사람들>에 나오는 주 무대였던 신설동 4번지는 이미 새벽에 강제철거되어 성남으로 강제이주를 한 상태여서 중랑천 뚝방으로 임시거처를 옮겼다. 그 얼마 지나 또다시 강제철거가 집행됐다. 1975년 말쯤으로 기억된다.

사랑방교회 설립예배를 드렸을 때 그 자리에 문동환 목사, 서남동 교수, 안병무 선생,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 김동환 목사, 허병섭 목사, 이상윤 목사, 오용식 목사, 임흥기 목사, 이규상 목사, 이해학 목사, 함석헌옹 등 쟁쟁한 분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뤘다. 주민 조직활동을 한달도 하지 않았는데도 철거민 2백여명이 함께 자리를 했다. 필자가 기술한 호소문을 지역주민 대표에게 전해줘 낭독하게 했다. 필자가 쓴 호소문이 바로 <어둠의 자식들>에 나온 대목 중 하나다. 철거민 대표 나기화라는 40대 중반의 여성이 낭독하는 동안 참석한 어른들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친 그분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설립예배를 마치고 차를 나누는 시간에 문익환 목사님이 필자에게 다가와 “이 선생 글을 써요. 시도 써보고요”라고 칭찬하는데 옆에 있던 허병섭 목사가 “호소문 너무 잘 썼어요”라고 했다. “이철용 선생 공부하세요. 영어도 배우고 신학공부 하세요.”

이문영 교수님이 어깨를 치면서 용기를 주셨다. 필자는 칭찬받아 기분이 들떠 있었는데 누군가 등을 꽉 껴안아 주면서 “이 선생이니까 가능한 거예요. 수고 많았어요. 민중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그분이 바로 문동환 목사님이었다. 그분들의 칭찬과 격려로 <어둠의 자식들> <꼬방동네 사람들> 등이 세상에 선보이는 단초가 됐다.

광주대단지 사건, 사랑방교회 십자가 오물사건을 통해 빈민을 바라보는 지식인과 종교계의 양심 있는 성직자의 모습이 빈민현장에서 자주 목격되곤 했다. 이분들의 모습이 보이면서 현장운동은 탄력을 받았고 민중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박형규, 권호경, 김동환, 이해학 등 ‘수도권도시빈민특수선교회’ 활동을 묵묵히 실천해온 목사님들의 믿음은 ‘남산부활절 사건’을 일으켰고, 다시 빈민선교로 불이 옮겨 붙었다. 청년·학생들까지 빈민현장으로 뛰어들어 야학, 어린이집, 공부방 등 빈민선교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필자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문동환 목사님, 이문영 교수님, 안병무 교수님, 이우정 교수님, 문익환 목사님 등이 뜻을 모아 세운 ‘갈릴리교회’(이해동 목사님이 시무하는 한빛교회 장소)를 시작부터 끝까지 빠지지 않고 다닌 점이다. 그 까닭은 필자를 거듭나게 만든 곳이 갈릴리교회이기 때문이다. 갈릴리교회의 설립취지는 민중교회의 모태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광주대단지 사건, 중랑천변 뚝방동네, 사랑방교회 십자가오물사건 등이 갈릴리교회의 배후이며 기반이었다. 이를테면 ‘어둠의 자식들’ ‘꼬방동네 사람들’의 쉼터가 바로 갈릴리교회였다. 문동환 목사님에 대해 ‘떠돌이 목자’라고 부르는 까닭은 갈릴리교회에서 찾아야 한다. 갈릴리교회는, 필자에게 ‘갈릴리’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해준 곳이고, 교육으로 무장시켜준 유일한 교회학교였다. 필자에게 최종학력을 물어보면 주저 없이 문동환 목사님이 설립한 ‘갈릴리교회 학교’라고 대답하리라. 근현대사의 아픔을 정면승부로 겪어낸 목사님들과 양심이 녹슬지 않은 교수님들이 포진하고 있는 갈릴리교회야말로 최상의 예수학교다. 한국민주주의 꽃이며 생명젖줄이다.

1978년쯤으로 기억되는데 동월교회 담임목사인 허병섭 목사가 투옥됐을 때 문동환 목사님은 지체 없이 김성재 목사(전 문광부장관)를 파송해 교회를 섬기도록 했다. 말과 행동 즉 언행일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문 목사님은 민중신학이 성경책 속에만 갇혀있고, 도서관에 비치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빈민들이 살아가는 현장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누누이 강조하셨다.

민중과 함께 민중을 섬기며 민중을 영접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문 목사님의 굳건한 신앙과 행하는 믿음은 지금도 빈민현장에서 유유히 흐르고 민중 속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너희는 갈릴리로 가라.”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문동환 목사님의 음성이 지금도 귓전을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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