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50돌 성남 주민교회 이해학 원로목사의 ‘반성문’

[아시아엔=이해학 성남 주민교회 설립목사 겸 원로목사] 주민교회 창립 50주년 축사를 부탁을 받았지만 나는 참회하며 반성문을 쓰고 싶다. 1973년 3월 1일 어린이들의 자발적 활동으로 시작된 주민공동체 출발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이었다.

세상 대부분 사람이 준비 없이 결혼하고, 어버이가 되지만 목사는 그래서는 안 되는데 나는 목사에게서 필수적인 덕과 지적, 영적 훈련을 갖추지 못한 채 목사가 되었다. 나는 원래 생활력이 강한 편이었으므로 바울처럼 자립목회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지나고 보니 삯꾼 목자처럼 살고 말았다.

주민교회 기공식 때 새긴 ‘진리의 터’와 ‘정의의 기둥’. 교회 개척 8년 후인 1981년 여름 공사를 시작했다. 

성남에 나를 파송한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KMCO)가 내게 준 미션은 병원설립을 비롯한 지역사회 조직가로서 빈민의식화(Consciousness)였다. 그러나 나는 체질상 교회 공동체를 고집하였다. 나는 보수적 신앙인 인과보응의 ‘심판하는 하나님’ 신앙에서 빠져나와 내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체험을 호흡하려 노력해 왔다.

이에 사후의 천국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생명의꽃을 피워야 함을 강조해왔다. 예수 공로를 믿기만 하는 구원보다는 나를 비워 깨달음을 중시하려 하였다. 내 속에 하나님의 신성이 머물도록 하는 동시에 이웃 특히 사회적 약자와 상생관계를 갖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관상기도(觀想祈禱)를 해온 것이다. 처음부터 Missio Dei(하나님선교)를 추구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JPIC(정의·평화·창조질서 회복) 실천이 따라야 하는데 정치투쟁에 비중이 쏠리면서 방향을 잃어 항상 외도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목회자로서 나는 구원의 주체인 ‘산모’가 아니라 구원의 협력자인 ‘산파’로서 역할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복음주의를 표방한 교회주의에 근거한 근본주의에 동조하지 못한다.

1989년 주민교회 총동원주일 예배 모습이다. 

나는 피곤에 지친 사람들이 마음대로 뛰어노는 열린마당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것이 주님이 나에게 섭리하신 주민교회다. 그 마당에서 꼴찌마라톤을 비롯해 꼴찌들 축제를 자주 하였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노래하고, 춤추고, 연극하고, 구호 외치고, 말씀 명상하고, 기도하였다. 우리는 세상사에 구경꾼이 아니고 선수로, 주인공으로 뛰고 놀았다.

우리는 교회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남한산성에서, 경찰서 앞에서, 국정원 앞에서, 교도소 뒷산에서, 노동자투쟁 현장에서, 때로는 최류탄을 뒤집어 쓰고 눈물 흘리며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예배드리다 경찰서에 끌려가고 매 맞으며 성탄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일은 대부분 교우들이 제안하고 스스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나는 믿음이 부족하여 더 빨리 성과를 거두려는 욕심으로 가끔 간섭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보리를 더 빨리 자라게 하려고 보리 줄기를 뽑는 격이었다.

‘3.1절 기미독립운동 및 주민공동체 설립 축제’, 부활절, 감사절 축제와 필경 김종태 추모제까지도 주제를 갖도록 요구하였다. ‘주민과 함께사는 주민공동체’, ‘주민공동체 헌장’, ‘통일민족을 위한 함께 사는 운동’, ‘남과 북이 더불어 사는 운동’, ‘해직 전교조를 지원하는 축제’, ‘노동자와 연대하여 민주사회건설’, ‘군부독재 타도하고 민주주의 완수하자’, ‘우리 손으로 헌법을 개정하여서 감사합니다’ 등이 교우들이 스스로 발상해 나오기를 기다려야 하였다.

그런데 나는 답답한 나머지 ‘산모’가 되어버렸다. 나의 ‘공과주의에의 몰입’은 날이 갈수록 교역자의 비중이 커지면서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하던 영역을 침범해 버린 것이다. 그러는 사이 평신도 지도력이 약화되고 교우들이 수동화되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이를 벗어나고자 정관개정을 통한 개혁교회를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잡음과 분열만 가져오고 말았다. 이미 신뢰의 벽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런 조급증은 믿음의 한계를 드러냈다.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은 교회의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지 주민들에게 일깨워줬다. 주민교회 설립의 계기가 된 것이다.

강제로 이주당한 주민들이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삶을 정착하기 위해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한 일은 잘한 일이다. ‘주민신용협동조합’과 ‘주민생활협동조합’, ‘성남 YMCA’, ‘외국인노동자공동체’ 등을 기획자인 나 자신이 독점·주도하는 관행을 벗어나 일꾼들에게 맡기고 간섭하지 않은 것도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실무능력과 이해타산을 넘어서는 지도자 훈련 특히 크리스천의 나눔과 희생봉사의 영성을 그들에게 길러주는 일은 목회자 몫이었으나 이를 소홀히 하는 잘못을 범한 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로 남는다.

1973년 3월 1일 교회 창립 때 현판 옆에서 이해학 목사

나는 몇 번의 옥살이와 사회에서 몰려오는 책임들에 붙들려 교회를 섬기는 일에 한계에 직면해 있었다. 책임 맡은 일에 치여서 영적 고갈에 시달릴 때 목회에서 손을 떼어야 함에도 그리 못한 과오를 범하였다.

당시 나는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을 구호처럼 외쳤다. 우리교회는 1987년 6월항쟁의 감격과 통일행진의 전위대로서 많은 사건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성경을 통한 신문 해석이 아니라 신문을 통한 성경해석의 우를 범하고 말았다. 최소한 우리 안의 중심을 잡아가는 핵심그룹은 말씀으로 세상을 읽어야 했다. 그것이 당회일 수도 있고 ‘열린개혁그룹’일 수도 있다. 저마다 자기역할을 다하며 주장과 개성이 강한 지도자들을 섬세하고 깊게 섬기는 정성이 나에게 부족하였다.

성남 주민교회 전 교인이 창립 30주년을 맞아 단체 촬영을 했다. 

누가 뭐래도 교회는 자기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서 청지기의 자세로 사는 주인이 되도록 돕는 ‘지원공동체’, 소유와 경쟁의 강박증에 집단 중독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와 개인을 치유하는 ‘치유공동체’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많은 사건을 상담하고 쫓아가서 함께 싸워주며 해결해주는 역할에 그쳤다. ‘메시아 콤플렉스’에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목회는 교회라는 틀과 시스템을 따라가는 관행을 벗어나기 어렵고, 설교도 교조적 논리에 빠져들곤 하였음을 후회하고 반성한다.

3월 1일 열린 주민교회 50주년 축제. 오른쪽 네번째가 필자 이해학 목사

나는 많은 사건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에는 후에 정부의 주요직책이나 지방자치 지도자들이 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는 사회참여를 통하여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고 우리 사회에 지속적으로 소금과 빛이 되는 선한 지도력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정치인들을 비롯한 기타 활동가들이, 출발은 신앙과 정의감으로 하였어도 자기 세계에서 자리가 잡히면 그 조직의 속성과 관행을 극복하기 쉽지 않다. 그러기에 큰 책임에는 더 깊은 영적 단련이 필요함을 주지시키고 공동체와 지속적 경건훈련을 하는 프로그램을 권해야 함에도 그리 못하였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은 생명의 영이다. 생명은 빛의 에너지다. 하나님은 지구로부터 1억5천만km 떨어진 태양을 45억년전부터 수소와 헬륨을 태워서 지구에 생명이 살도록 만들어 주셨다. 그러나 앞으로 태양은 80억년 후에는 적색거성으로 변한 후에 소멸된다고 과학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태양이 소멸되면 지구도 인간도 수명을 다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은 빛의 세계이다. 이 빛이 모든 생물과 인류에게 값없이 나누어져 생명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아직은 햇빛 안에서 만물이 생존한다.

그래서 빛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빛의 본질을 회복시킨다. 존재라는 수레는 ‘됨’과 ‘함’이라는 두 개의 바퀴로 돌아서 인류(공동체)라는 역사를 만들어간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용기, 긍정성, 희생과 적극성을 나의 삶에서 얼마나 실천하였는지 되돌아볼 때 부끄러움뿐이다.

우리는 두 번 대통령을 만드는데 앞장섰고 6월항쟁이라는 민중승리를 체험한 자랑스런 경험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더 단세포적이고 더 심각한 제로섬 싸움에 휘몰리고 있다. 정의로운 정치가 상실된 채 패거리정치로 전락해 버렸다.

교인들과 최루탄 뒤집어 쓰면서 통일행진을 한 것이 나에게 큰 행복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통일논의는 이념적 진영논리에 매여있어 안타깝다. 남과 북은 대결구도로 전쟁의 극단으로 더 치닫고 있다. 이것은 어느 대통령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간에 편향적 진영논리에 안주한 결과일 것이다.

‘민족분단 70년’의 문제를 해소하지 못한 채 ‘주민(교회) 50주년’을 맞이하는 것이 자못 가슴 아프다. 내가 선이고 우리가 옳다는 자만과 아집 속에서 다른 교단, 큰교회와 연대하는 노력을 포기한 우리의 소심하고 결벽주의적인 행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믿음의 구원에 도취되어 지금도 현장의 아픔을 호소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있고, 제3지역통일론이나 중립국운동을 연구하고 고민하고 기도하며 함께 관계하는 믿음의 생활을 못하는 것은 우리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분단을 고착시키는 ‘평화통일론’에서 남과 북이 이념을 넘어 다물통일론인 ‘통일평화론’으로 나아가기 위해 남북윷놀이를 징검다리로 하는 것은 소극적으로 보이나 본질적 변화를 기도하는 것이다.

‘교회에 전할 마지막 메시지’ 메모판에 적힌 글귀들.

무엇보다 내 인생에서, 그리고 주민교회의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과오는 서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공동체를 기대하다 떠난 이들이 전국에 흩어져있고, 기대하고 기다리다 세상을 떠나신 분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괴로움을 금치 못한다. 여러 사람이 가진 역량을 집중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임에도 나는 말로만 공동체를 외치고, 함께 결의했던 약속을 실천하지 못하였다.

그간에 부족한 종을 믿고 따라주며 적극 협력한 믿음의 형제들이여, 부족한 종을 용서하소서. 

주민교회의 50주년을 감사하며, 세우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미를 돌린다. 

오늘날 주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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