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과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 “어머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찌 그리움이 없을까? 정희성 시인의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라는 시가 마음에 닿는다.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골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그리움은 어떤 사람이나 시간 혹은 사물을 보고 싶거나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은 인지상정이다.
예를 들면 헤어진 연인, 어린 시절, 추억의 물건이나 게임 등 대체적으로 현재 시점에서 다시 만나기 쉽지 않고, 예전의 상태로는 돌아가기가 쉽지 않거나 불가능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는 소중함을 몰랐다가 나중에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움이 사무치면 우울해지기도 하고, 심지어 마음의 병을 불러와 몸져 눕기까지도 한다.
몇 해 전, 미국 어느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시험문제를 냈다. 시험문제는 “첫 글자가 M으로 시작하는 단어 중 상대방을 끌어 들이는 성질과 힘을 가진 단어를 쓰시오”였다.
정답은 magnetic(자석)이었다. 그런데 85% 이상의 학생들이 답을 mother(엄마)라고 썼다. 할 수 없이 고민하던 선생님이 마침내 ‘mother’를 정답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학생들이 M으로 시작하는 말로 상대를 끌어들이는 성질을 가진 단어를 ‘마더’로 기억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 얼마 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1위로 선정된 단어 역시 어머니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은 젖 먹는 자기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동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 모습이라고 한다.
사진전시회에서 최우수작품으로 선정된 작품을 감동 깊게 본 적이 있다. ‘기다림’이라는 제목의 사진으로 해질 무렵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의 뒷모습이다. 한자의 ‘친’(親) 자가 바로 동구 밖 나무 위에 올라가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다.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가장 그립지 않은가? 필자 어머니는 이미 열반에 드신 지 오래다. 그 전쟁 통에도 그 작은 체구에서 어찌 그리 큰 힘이 나셨을까?
머리에 수건 하나 둘러쓰시고도 우리 6남매를 키우고 그 엄혹한 세월을 이겨 내셨다. 억척스럽기까지 하신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왈칵 솟아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어머니 곁으로 돌아갈 때가 다가오기 때문인 것 같다. 어머니야말로 기다림과 그리움의 대명사다.
전쟁이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을 가다 폭탄이 떨어지면 아버지는 짐 보따리를 잡고 몸을 숨기지만 어머니는 아이들을 안고 방패막이가 된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 어머니가 바로 그런 분이셨다. 이렇게 기다릴 수 있고, 그리워 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
사랑은 그리움이고 기다림이다. 그래서 그리움과 기다림은 사랑의 또 다른 말이다.
어느 시골에 화재가 났는데 불이 꺼지고 난 다음 날 광에 들어가 보니 암탉이 병아리들을 품은 채 새까맣게 타 죽고, 병아리들은 모두 살아있었다는 실화가 전해진다.
가족여행을 간 자식이 늙은 어머니를 홀로 둔 채 돌아가 버려 경찰이 양노원에 입원시켰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놀라운 것은 그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과 주소를 결코 대는 일이 없다고 한다. 자식은 어머니를 버려도 어머니는 자식을 결코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모든 인간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고향같은 존재다. 모든 것을 다 품어 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시고도 기억하지 않는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는 어머니! 이 세상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셨던 그 분이 못내 그리운 것은 간절하게 어머님 곁으로 달려갈 때가 되어서가 아닌가 싶다. 어느새 2020년 세모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