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시인, 이중섭 ‘천도복숭아’에 가슴 민 구상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우리말에 ‘그냥’이라는 말은 어떠한 작용을 가하지 않거나 상태의 변화 없이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다. 사람이 사는 뜻이 ‘사람과의 만남’에 있다는 것을, 나이 먹어가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그냥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떤 것보다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냥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단순히 행운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아마 수백 생의 인연(因緣)의 결과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그냥 좋은 사람, 그 중에도 한평생 서로를 높여주고, 디딤돌이나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하는 사람이라면 일생의 도반(道伴)이고 동지(同志)가 아닐까 싶다.
도반이란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으로서, 도(道)로써 사귄 친구라는 뜻이다. 도반은 깨달음을 목적으로 같은 도를 수행하는 동지를 가리킨다. “좋은 도반을 만났다는 것은 공부의 모든 것을 이룬 것과 같다”는 부처님 말씀이 있다.
그리고 동지(同志)는 파란고해(波瀾苦海)가 끊일 새 없이 일어나는 속세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말한다. 동지는 굳은 신념과 함께 목적을 이룰 때까지 모든 잡스런 생각이 없어야 하고 배신이나 탐욕과 같은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정신세계에서는 도반이 필요하고 속세에서는 동지가 있어야 삶의 활력을 되찾게 된다.
‘초토의 시’ 시인 구상(1919~2004)과 ‘황소’ 그림의 화가 이중섭(1916~1956)은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는 동지였다. 어느 날 구상이 폐결핵으로 폐절단 수술을 받았다. 몸과 마음이 약해진 탓인지 절친한 이중섭이 꼭 찾아와 주기를 기다렸다.
평소 이중섭보다 교류가 적었던 지인들도 병문안을 와주었는데, 섭섭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 친구가 무슨 사고라도 생긴 것은 아닌가 걱정이 들 지경이었다. 그때 이중섭이 찾아왔다. 심술이 난 구상은 반가운 마음을 감추고 짐짓 부아가 난듯 말했다.
“자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그 누구보다 자네가 제일 먼저 달려올 줄 알았네. 내가 얼마나 자네를 기다렸는지 아나?” 그러자 “자네한테 정말 미안하게 됐네. 빈손으로 올 수가 없어서” 하며 갖고 온 꾸러미를 풀어보니 천도복숭아 그림이 있었다.
“어른들 말씀이 천도복숭아를 먹으면 무병장수한다지 않던가. 그러니 자네도 이걸 먹고 어서 일어나게.” 구상은 한동안 말을 잊었다. 과일 하나 사올 수 없었던 가난한 친구가 그림을 그려오느라 늦게 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구상 시인은 2004년 5월 11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천도복숭아를 서재에 걸어 두고 평생을 함께 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도반과 동지들 모두가 갈구하는 우정이다. 그냥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미로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그리고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눈에 아롱거리며 미소 짓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크나큰 기쁨이다.
도반과 동지가 되려면 서로 지키는 바가 있어야 한다.
첫째, 몰래 험담하지 않는다. 험담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관계는 끝장난다.
둘째, 무의미한 논쟁은 하지 않는다. 진실한 도반과 동지는 어떤 주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 그 의견을 존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셋째, 난처한 상황에 처하도록 두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망년회 석상에서 음치인 저더러 노래를 부르라고 해 한곡 부르다가 골목을 잊어버렸다. 당황하고 있는 순간 한 도반이 튀어나와 거들어주어 위기를 모면한 생각이 난다.
넷째, 성공을 질투하지 않는다. 진실한 도반과 동지는 성공을 질투하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다섯째, 바라는 바가 없어야 한다. 관계는 어려움을 겪을 때 확연히 드러난다. 힘들 때일수록 등 돌리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성의껏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며, 결코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도반과 동지 사이에 서로 가까이 하면 가라앉던 공부심도 일어나고, 없던 사업심도 생겨나며, 의혹이나 원망심도 사라지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곧 그 마음이 살아 있는 사람이고, 그냥 좋은 도반 동지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