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윤 칼럼] ‘국민화가’ 박수근과 이중섭
지난 9일 국립중앙박물관 강당에서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 100년> 제5강 ‘박수근, 이중섭’을 오후 2시부터 두 시간 동안 아내와 함께 수강했다. 정하윤 박사(이화여대)가 국민화가로 사랑받고 있는 박수근과 이중섭의 다양한 작품들을 시대별로 자세하게 설명했다.
미석(美石) 박수근(朴壽根, 1914-1974)은 ‘국민화가’ ‘민중화가’ ‘서민화가’라는 수식어처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다. 박수근은 1914년 2월 21일 강원도 양구 읍내의 정림리에서 태어났다. 7세 때 가세가 기울어 병든 아버지와 동생들을 돌봐야 했지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12세 때 프랑스 화가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만종(晩鐘, The Angelus)’을 보고 훌륭한 화가의 꿈을 키웠다.
박수근은 양구공립보통학교를 1927년에 졸업하지만,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산과 들을 다니며 스케치를 했고, 농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수채화로 그렸다.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와 1936년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다. 1940년 평생의 후원자인 김복순과 결혼하여, 아내를 모델로 삼아 자주 그림을 그렸다. 결혼한 해에 평안남도 도청 사회과에서 서기로 취직했다. 광복 이후 강원도 철원군 금성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했다.
박수근은 1950년 6·25전쟁 때 한국에 온 월남(越南) 작가이며, 미군 PX(Post Exchange)에서 미군과 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때 모은 돈으로 창신동에 집을 마련했고 그림 작업을 이어갔다.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집’이 특선, ‘노상에서’가 입선했다. 이후 매년 국전에 출품하여 입선했고, 1955년에는 ‘두 여인’으로 국회문교위원장상을 받았다. 1959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추천작가 그리고 1962년에는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박수근이 국전의 추천작가가 된 1959년부터 그의 그림은 완숙한 수준에 이르러 대작들을 발표했다. 이 시기에 그린 ‘쉬고 있는 여인’ ‘노인과 아동’(1959) ‘노상의 소녀들’(1960) ‘노인’(1961) ‘농악’(1962) 등은 그의 특유의 화강암 같은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이 무르익으며 독창적인 예술 세계의 절정을 보여준다.
박수근은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박수근은 1950-60년대 시장의 풍경과 상인의 모습을 즐겨 그렸으며, 그의 ‘노상(路上)’ 시리즈는 당시 흔하게 주변에 볼 수 있었던 거리의 풍경을 담고 있다. 박수근의 그림에 나타나는 토속적인 미감과 정서는 이때부터 그의 가슴에 새겨졌다.
박수근은 생존 당시 국내 화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박수근 그림의 진가는 외국의 미술 애호가들이 먼저 알아보았다. 당시 박수근의 그림은 반도호텔 내 반도화랑을 통해 주로 한국에 온 미국인 애호가들에게 팔렸다. 더불어 이 시기에 해외 전시회에도 초대되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2년 주한미공군사령부가 주선한 ‘박수근 특별 초대전’이 열렸고, 이때 외국 애호가들이 박수근의 그림을 상당수 소장했다.
박수근은 건강이 악화되어 1965년 51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해 10월 아내 김복순은 남편의 작품을 모아 ‘박수근 유작전’을 열었다. 박수근의 유해는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묻혔다가, 2004년 박수근미술관으로 옮겨졌다. ‘박수근미술관’은 2002년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에 개관하였다.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은 1916년 9월 16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이중섭의 집안은 부농이자 지주로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외조부(이진태)는 서북 농공은행장, 초대 평양상공회의소 회장 등를 역임할 정도였다. 5살이던 1920년, 부친(이희주)이 세상을 떠났지만 친가와 외가 모두 엄청난 부자여서 경제적인 부족함은 없었다.
1930년 평북 정주의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당시 미술 교사였던 임용련의 지도를 받으면서 화가 꿈을 키웠다. 임용련은 미국 예일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며, “조선 사람은 조선 화풍으로 그려야 한다”는 연설에 깊게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1932년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에서 ‘촌가’로 입선했으며, 1933년에는 학생작품전에서 ‘풍경’으로 입선했다.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 후 중퇴하고, 도쿄문화학원(분카가쿠인) 미술과에서 1943년 졸업한 후 귀국했다. 이중섭은 1938년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입선한다.
이중섭은 미남에다가 운동, 노래도 잘하고 그림 실력도 탁월해 교내의 인기스타였다고 한다. 이중섭은 같은 미술부 한 해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를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연애 중에 서로를 ‘아고리’, ‘아스파가거스’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1945년 5월 20일 이중섭은 야마모토 마사코(1921-2022)와 원산에서 결혼을 했으며. 마사코에게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마사코 아버지는 미쓰이창고주식회사 고위 임원을 지냈을 정도로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다. 이중섭 부부는 아들 셋을 두었으나, 1946년에 출생한 장남은 디프테리아(diphtheria)로 사망했다.
이중섭은 1950년 12월 6·25전쟁 때 북한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왔으며, 1951년에는 제주도 서귀포로 피난을 갔다. 1952년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 동경으로 보내고, 이중섭은 홀로 남아 통영, 마산, 진주, 서울, 대구를 전전하며 그림 제작과 전시를 했다. 1953년 일본에 가서 가족들을 만났으나 며칠 만에 귀국했다. 이중섭은 귀국 후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했다.
이중섭은 1952-56년 유화(소, 어린이, 풍경 등)와 은지화(담배갑 속의 은지에다 송곳으로 눌러 그린 일종의 선각화)를 그렸다. 이중섭의 은지화 작품 3점이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된 바 있다. 1955년 1월에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전시회를 성공리에 개최하였다. 대구 미공보원(USIS)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 그가 추구하였던 작품의 소재는 소·닭·어린이·가족 등이 가장 많다. 소재상의 특징은 향토성이 강하게 띠는 요소와 동화적이며 동시에 자전적인 요소이다.
이중섭은 1955년 7월 생활고로 건강을 크게 해쳐 영양실조와 거식증(拒食症, anorexia nervosa)이 생겨 친구 구상이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시켰다. 10월엔 성베드루 정신병원으로 옮겨졌고, 상태가 다소 호전되어 12월에 퇴원했다. 퇴원 후에 삽화와 표지화를 다수 제작했다. 이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청량리정신병원 무료입원실에 입원했다가, 병원장에 의해 정신이상이 아닌 심한 간염증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했다.
그러나 여름에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황달, 정신병, 거식증 등이 겹쳐 안타깝게도 1956년 9월 6일 향년 40세라는 한창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다. 친구들이 병문안을 가자 며칠 전에 죽은 이중섭의 시체가 침대 위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에 평소에 친한 사이였던 시인 구상이 그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를 치렀다. 이중섭의 무덤은 서울 망우리공원묘지에 있다.
정부는 1978년 이중섭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제주도 서귀포시는 1997년 이중섭 가족이 거주했던 초가집을 매입해 복원했다. 또한 2002년 11월 이중섭전시관을 개관했으며, 2003년 3월에 ‘이중섭미술관’으로 승격했다. 부인 이남덕은 남편을 잃은 이후에도 평생을 수절하다 일본 도쿄에서 노환으로 2022년 8월 13일 101세에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