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중섭③] 맥타가트·MoMa와 인연···”내 소가 스페인 산? 한국 소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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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화백의 ‘황소’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필자는 이중섭의 작품 중에서 소 그림을 특히 좋아한다. 아래 글은 1951년 봄 6·25전쟁 때 가족과 함께 피난을 가서 생활했던 제주도 서귀포의 이중섭의 방벽에 붙어 있었다고 한다. “<소의 말>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대향”

이중섭은 풀밭에 매어놓은 소를 하루 종일 관찰하다 소 주인으로부터 ‘소도둑’으로 경찰서에 고발당하기도 했다. 자세하게 관찰한 소를 화폭에 담아 <소> <황소> <흰 소> <소 두 마리> <싸우는 소> <소와 소녀> <소와 어린이> <길 떠나는 가족>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37년 자유미전에서 최고상인 ‘태양상’을 수상했으며, 당시 그의 작품 경향은 민족적인 의지력이 강력하게 노출된 <소>의 연작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중섭이 서른여덟에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모처럼 창조적 예술 혼을 불태웠으며, 그때(1953-54) 이중섭의 예술 의지를 보여준 작품이 붉은빛 황혼에 울부짖는 검은 눈망울의 <황소> 그림 두 점이다. 이 두 작품은 이중섭의 자화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

‘소’ 그림에 얽힌 일화도 있다. 1955년 이중섭이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데 소 그림이 많았다. 전시회를 관람하던 아서 맥타가트 박사가 무심결에 “참 스페인의 투우만큼 힘이 차군요”라고 했더니 곁에 있던 이중섭이 이 말을 듣고 전시장 벽에 걸린 소 그림 몇 점을 떼어내 팽개치면서 “이건 스페인 소가 아니고 한국의 ‘소’란 말이요”라고 소리치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맥타가트 박사는 대구 미국공보원장을 역임한 후 영남대 영문학과 교수(1976-97)로 재직했다.

맥타가트 박사는 이중섭이 위대한 화가라는 것을 맨 먼저 알아본 서양인이다. 그는 이중섭의 은지화 석 점을 구입하여 ‘모마(MoMA)’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뉴욕 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1929년 근대 예술을 미국에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된 MoMA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이중섭의 은지화를 “예술성뿐 아니라 소재 사용과 작가의 창의성으로 봐서도 실로 매혹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금번 이중섭 전시회를 위해 MoMA에서 소장하고 있는 은지화들이 바다를 건너 서울에 왔다.

정부는 고 이중섭 화백에게 문화훈장을 1958년 10월 20일 추서했다. 이중섭의 아내는 지난 2012년 제주도 서귀포 옛집을 방문하여 옛날을 회상하면서 고인의 사진을 보고 “왜 그렇게 일찍 갔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부인 이남덕 여사는 95세다.

이중섭은 화가로 화려한 삶을 누리지 못했지만 사후에 ‘서양회화의 기초 위에 동양의 미학을 실현시킨 화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전시회에는 개인 소장가는 물론 미국 현대미술관 등 60여 곳에 흩어져 소장되고 있는 작품 200여점과 그와 관련된 100여점이 모였다. 전시회를 통해 ‘정직한 화공’ ‘대한 민족의 국민화가’ 그리고 ‘마음이 따뜻한 아버지’ 이중섭의 숨결을 재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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