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중섭②] 무연고자로 홍제동 화장터 거쳐 망우리서 예술혼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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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화백의 담뱃갑 안 ?은지에 새겨 넣은 은지화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1950년 6·25전쟁이 터진 후 12월 6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UN군이 후퇴할 때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부산에서 한때 부두노동을 했다. 1951년 1월 가족을 데리고 제주도 서귀포로 갔으며, 먼저 와있던 조카를 만나 이웃에서 지냈다.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였으며, 해변에서 작은 ‘게’를 수없이 잡아 반찬으로 먹었다. 이중섭은 게에게 미안하여 게를 그린다고 말했다. 12월에 가족을 데리고 다시 부산으로 가서 판잣집 단칸방에서 생활했다.

1952년 2월 국방부정훈국 종군화가단에 입단했으며, 담뱃갑 안에 있는 은지에 그림을 새겨 넣은 은지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참담한 생활고로 영양실조가 된 자식들을 위해 이중섭 아내는 두 아들과 함께 부산의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제3차 일본인 송환선으로 동경 친정으로 건너갔다. 이중섭은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선원증을 얻어 동경으로 건너가 그리던 아내와 아들을 만났으나 2주 만에 돌아왔다.

동경을 다녀와서 경남 통영으로 거처를 옮겨 제작에 몰두했다. <황소>는 당시의 작품이다.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유화 41점, 연필화 1점, 은지화를 포함한 소묘 10여점을 출품하여 개인전을 열어 큰 호평을 받았다. 그림도 반 이상 팔렸으나 판매대금 수금이 여의치 않고 날마다 모여드는 사람들을 거절 못해 저녁마다 함께 술판을 벌려 결국 빈털털이가 됐다.

이에 이중섭은 극도로 의기 쇠진하여 초조와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면서 원망과 자학으로 보냈다. 서울 전시회에서 남은 작품을 가지고 구상의 권유로 대구로 갔으나 이미 절망감에 젖어 무언의 항거를 시작했다. 5월에 미국공보원(USIS)에서 전시회를 개최했으나 영양실조와 극도로 쇠약하여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성가병원에 7월 한달 동안 입원했다. 8월말에 서울로 와서 종군화가단이란 명목으로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했다.

1956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음식섭취를 거부하는 거식증이 생겼다. 청량리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나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간염 치료를 위해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 9월 6일 병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없이 홀로 숨을 거두었다. 나이 만 40세였다. 무연고자로 취급되어 3일간이나 시체실에 방치되었다가 뒤늦게 친지들이 모여들어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 후 봉원사에 안치했다가 후에 망우리에서 장례를 거행했다.

이중섭은 원산여자사범학교 미술교사 2주 근무가 취직의 전부였으나, 그림은 그의 생존과 생활과 생애의 전부였다. 그는 재료에 구애됨이 없이 발상이 일어나면 주변에 있는 아무 것이나 사용했다. 이에 그의 작품 중 캔버스에다 유화로 그린 것 보다 종이, 시험지, 심지어 합판 등에 그린 것이 더 많다.

물론 빈곤 때문에 일어난 결과로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종이, 담뱃갑 은지에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지만, 담뱃갑의 은지에다 그린 작품은 미술재료의 확대라고 해서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유화, 수채화, 크로키, 데생, 에스키스 등 약 200점, 은지화 약 300점을 남겼다. 이중섭의 만년의 작품, 특히 은지화의 ‘모티브’는 거의가 가족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에 꽉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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