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년·작고 60년만에 덕수궁서 만나는 ‘은지화’ 이중섭
[아시아엔=정지욱 영화평론가, 문화평론가] 바닷가의 게는 집게발을 번쩍 들고 브이(V)자를 그리며 (아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듯) 소리친다.
“かんばれ”(간바레, 힘내라)
아내와 함께 일본에 있는 아들 태현과 태성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아내와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이 절절했다. 두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같은 구도의 그림을 그리고 각자에게 해주고 싶은 사랑이 가득 담긴 글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중섭만의 해학과 위트가 담긴 그림과 함께.
탄생 100주년, 작고 60년 기념 전시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이한 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의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다. 6월 3일부터 오는 10월 3일까지 4개월간 열리는 전시는 1970년대 이후 미술애호가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국민작가’로 알려진 그의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개인 소장가는 물론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 60여 곳에 흩어져 소장되고 있는 전작들과 가족에게 보낸 편지, 동경 유학시절 연애 감정을 담아 보낸 그림엽서 등 작품 200여점과 그와 관련된 100여점이 모였다. 관람객들은 최고의 안복을 누릴 것이 틀림없다.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며 예일대에서 수학한 서양화가 임용련에게 미술을 배웠다. 1930년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의 문화학원에서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받고, 문화학원 후배였던 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했으나 생활고로 가족들을 일본으로 보낸다.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작품을 남기고 쓸쓸하게 생을 마친 불운의 천재화가다.
이중섭의 생애와 함께 하는 전시공간
모두 4개의 전시실로 꾸며진 이번 전시는 △동경 유학 후 제주와 부산에서의 작품 △은지화와 통영에서의 작품 △일본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와 서울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의 개인전 작품 △말년의 대구와 서울 정릉에서의 작품 및 아카이브로 구성됐다. 따라서 작품들을 그의 연표와 함께 관람한다면 더욱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동경 유학시절이었던 1940년 12월 25일부터 1943년 8월까지 아내가 된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그림엽서를 보면 마사코를 향한 그의 마음, 그의 연정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신화에서’(1941, 종이에 청먹, 채색, 9x14cm, 개인소장)와 같이 먹지에 선을 그어 조심스레 그렸던 초기에 비해 조금씩 자신감에 불타는 과감한 채색과 터치의 그림으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만으로도 중섭과 마사코의 사랑의 깊이와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일본에서 귀국해 원산에서 그렸던 작품이 공개되어 눈길을 끌기도 한다. 엎드리고, 쪼그려 앉고, 드러누워 자세가 제각각인 세 인물이 화면 가득한 ‘세 사람’(1945년 경, 종이에 연필, 18.2×28, 개인소장)은 1943년 귀국해 원산에 머물던 시절 제작된 것이다. 1945년 해방을 기념해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해방기념미술전’에 출품하려 했다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전시되지 못한 작품으로 71년 만에 비로소 같은 장소에서 전시되는 작품이다. 두터운 종이 위의 무수한 연필 자국은, 두러누운 청년의 삶이 비록 허무하지만 힘찬 손과 발은 어두운 현실을 극복해내겠다는 중섭의 의지로 읽혀진다.
제주와 부산의 피난 시절 그의 작품들은 일반인들이 잘 알고 있는 아이들과 황소 그림 등으로 구성됐다. 보급품으로 배고픔을 달래던 가난한 서귀포 시절, 아이들과 함께 잡아먹던 게나 물고기와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작품들은 ‘봄의 아동’(1952-53, 종이에 연필, 유채, 32.6×49, 개인소장)처럼 생존과 유희 속에서 아이들과의 삶을 해학으로 담아낸 ‘생활의 작품’이라 하겠다. 부산 시절에는 종군화가로 김환기, 남관 등과 활동했고, 1952년 아내와 아이들이 일본으로 떠난 뒤 일본서적을 수입하는 서적무역을 하다 중개인이 부도를 내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한 위기를 맞는다. 이중섭은 이때 담배갑 안에서 담배를 싸매는 은지(銀紙)를 긁어 그림을 새겨 넣었다. 그 유명한 ‘은지화’다.
경제적으로 곤궁하고, 일본으로 떠난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들었던 이중섭에게도 행복한 시절이 찾아온다. 1953년 경남 통영에서 나전칠기기술양성소 강사로 일하며 작업하는 시기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술도 마시지 않은 채 제작욕이 왕창 솟아 작품이 산더미처럼 쌓인다”고 자랑할 만큼 안정된 작품을 내놓는다. 힘찬 필치의 황소 그림들은 물론 ‘욕지도 풍경’(1953, 종이에 유채, 39.6×27.6, 개인소장)이나 ‘벚꽃위의 새'(1954, 종이에 유채, 49×31.3, 개인소장)와 같이 부드럽고 서정적인 작품들도 선보인다.
통영에서의 생활에 용기를 얻은 이중섭은 서울로 올라와 박고석과 김환기에게 돈을 빌려 미도파백화점 화랑의 임대를 계약하고 전시를 준비한다. 한국일보에 삽화를 그려 내는 등 활발히 작업했던 그는 ‘서울에서 개최할 개인전도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아내에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약속하며 이를 아이들에게 편지로 써보낸다. 그는 이 전시회에서 ‘흰소’(종이에 유채, 1953-54, 34.2×53.0, 개인소장), ‘길 떠나는 가족’(1954, 종이에 유채, 29.5×64, 개인소장) 등의 작품 45점을 전시하여 평단에서도 호평을 받았으며, 작품도 20점쯤 팔렸다. 하지만 정작 수금이 제대로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아무런 해결을 하지 못하고 더욱 깊은 절망에 빠진다.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대구에 내려온 그는 삽화를 그리거나 작품활동을 하며 지낸다. 이 시기 그린 ‘시인 구상의 가족’(1955, 32.0×49.5, 개인소장)에는 세발 자전거를 타며 노는 구상의 작은 아들과 구상의 모습을 바라보는 자신이 담겨있다. 악수하듯 내민 이중섭의 손이 구상의 아들 손과 닿을 듯 말 듯 닿아있는 모습은 수없이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부끄럽고 부러운 마음이 작품에 표현된 것이다. 결국 대구에서 영양실조와 정신분열 증세, 거식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이중섭은 대구성가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게 된다.
1955년 8월경 구상과 조각가 차근호의 도움을 받아 ‘종군화가단’이었다는 명분으로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하며 서울에 올라온 이중섭은 박고석의 도움으로 퇴원해 정릉에 머물며 작품활동을 한다. 박고석의 증언에 의하면 1955년 12월말부터 이듬해 6~7월까지 삽화 이외에 소묘를 포함한 다수의 유화를 남긴다. 이 때 남긴 작품이 비극적 현실에 처한 자신을 상처받아 피 흘리는 소의 모습에 빗대 표현한 ‘소’(1955년경, 종이에 유채, 27.5×43.0, 서울미술관 소장), 흐릿한 풍경에 앙상한 나뭇가지를 두터운 검은 윤곽으로 표현한 ‘나무와 달과 하얀 새’(1956, 종이에 크레파스, 유채, 14.0×19.5, Museum SAN 소장) 등이다. 그리고 “1956년 9월6일 11시45분 간장염으로 입원 가료 중 사망, 이중섭 40세”라는 병원기록을 마지막으로 무연고자로 사망하게 된다.
아주 특별한 두 개의 전시실
이번 전시에는 아주 특별하게 마련된 두 개의 전시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은지화’를 위한 공간이며, 또 다른 하나는 ‘편지화’를 위한 그곳이다.
제2전시실에 들어가면 관람객은 어두운 공간에 하얗게 빛나는 그의 은지화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마치 어두운 절집에서 환하게 미소 짓는 부처님을 만나듯 은지화들이 제각각 자태를 뽐내며 다가온다. 게다가 한쪽 벽면에는 고화질로 스캔 작업한 작품들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은지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낙원의 가족’(1950년대, 은지에 유채, 새김, 8.3×15.4, MoMA 소장)처럼 아이들, 부처님에서 야릇한 춘화까지 다양한 소재를 만날 수 있다.
때문에 일부에선 판매를 위한 싸구려 그림으로 치부하기도 했지만, 서귀포 시절의 행복했던 가족과의 모습부터 비극적인 사회상황과 자신의 처참한 현실까지 그가 처했던 현실을 오롯이 담아낸 작품이라 하겠다. 특히 은박을 긁어 새겨 그 부분에 물감을 입히거나 채색한 기법은 고려시대 상감청자의 은입사 기법을 떠올리며 전통을 존중했던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은지화’라는 진귀한 작품의 특징을 살려 특별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이번 전시에서는 아주 새롭게 전시장을 꾸며 놓은 것이다.
제3전시실에서는 그의 그림과 글을 함께 만나는 ‘편지화’를 만날 수 있다. 여느 전시실과는 달리 부드러운 갈색의 벽에 은은한 조명과 함께 작품들을 만나도록 기획된 이 곳에서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정을 편지내용과 함께 작품들을 통해 만날 수 있게 된다. ‘가족을 그리는 화가’(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 1953-54, 종이에 펜, 채색, 26.4×20.0, 개인소장)와 같이 유머 넘치는 편지 그림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그토록 사주고 싶어 했던 세발자전거를 탄 아이의 그림 곁 작은 창으로 내다보이는 작품들은 미도파백화점 화랑에 선보였던 작품들로 가족들을 향해 다가가려는 이중섭의 소망이 엿보인다.
‘백년의 신화’ 돼 다시 찾아온 이중섭
살아 생전 화가로 화려한 삶을 누리지 못했던 이중섭. 사후 ‘서양회화의 기초 위에 동양의 미학을 실현시킨 화가’라는 평가와 함께 한국 전통적 미의식을 담아내고자 했던 그의 작품은 미술애호가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된다. 비단 미술애호가가 아니더라도 그의 작품을 만나는 모든 이에게 어린 아이와 같은 ‘해학’, 가족에 대한 ‘애틋함’ 그리고 힘차고 자유분방한 필치로 ‘정직한 격조’를 느끼게 해준다.
이번 전시는 그 스스로 ‘정직한 화공’이며 ‘민족의 화가’로 ‘마음 따뜻한 아버지’였기를 바랬던 이중섭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필자 정지욱(鄭智旭, Ji-ouk JEONG, nadesiko0318@gmail.com)은 영화평론가, 문화평론가,?가톨릭문화원 어린이영화제 <날개> 수석프로그래머 겸 집행위원으로 한일문화연구소 객원 학예연구관, 일본 Re:WORKS 서울사무소 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덕원미술관 학예연구사, 홍갤러리 학예연구원,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 일본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