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함석헌 발길에 채여 90평생 통일운동” 퀘이커 이행우

이해학 목사가 추도사를 하고 있다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지난 10월 16일 별세한 이행우 선생은 대표적인 평화통일운동가로 꼽힌다. 이날 종로5가 한국기독교교회회관 조에홀에서 열린 ‘평화통일운동가 이행우 선생 추도식’의 추도사는 그의 삶뿐 아니라 1980년대 이후 통일운동 略史를 잘 보여줬다.

“60년이 훌쩍 지난 제가 대학 1학년 때 퀘이커 모임에서 동북고 선생님으로 처음 뵈었던 기억이···2004년 남북미 정치인들의 한반도평화안보포럼에서 바이든은 외교위원장으로 함께···조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옹호자로, 동포사회의 대변자로, 통일운동의 선구자로, 공공외교의 개척자···워싱턴, 뉴욕, 동경, 북경, 베를린, 북녘땅에 이르기까지 평화통일을 위한 큰 발자욱이 아직도 선연합니다.”(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젊은 시절 퀘이커운동을 하며 만난 함석헌 선생과 함께 한 이행우(오른쪽)

“1985년 10월 처음 만난 이후 우리는 조국의 하나됨을 위해 호형호제 하며 손에 손잡고 뛰고 또 뛰었습니다. 그토록 숨 가쁘게 뛰었던 그 길, 또 많은 후배들이 혼신 다해 뛰고 있으니 반드시 그날이 올 터입니다.”(신필영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 대표위원장)

“1998년 첫 만남 이후 선생이 사시는 필라델피아를 비롯해 어느 곳에서 만나든지, 그분은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특히 남녘의 분열상을 안타까워 하셨고, 통합과 단합의 중요성을 늘 일깨워주셨습니다. 1999년 서울에서 남북한, 재외동포 수만명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그런 정신이 바탕이 됐기 때문입니다.”(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

이행우 선생 

“친구이자 멘토인 이행우와 만난 것은 세기의 전환기, 내가 상원 외교위원회 직원이 된지 몇 년 지나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는 미주동포전국협회(NAKA)를 대표해 찾아와 한반도 평화를 촉진하기 위한 토론회를 요청했습니다.(중략) 그는 우리의 임무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성으로 바꾸는 것, 서로를 돌보는 것, 주변 사람들 특히 불우한 사람들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갖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행우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감사하고 많이 그리울 겁니다.”(프랭크 자누치 워싱턴 ‘모린 & 마이크 맨스필드 재단’ 대표 겸 CEO)

김홍인 간사

“선생님은 퀘이커교도답게 늘 검소했고, 말수가 적었으며,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는 퀘이커교에 무한한 애정을 쏟으셨고, 늘 뜻과 길이 한결같은 분이셨습니다.”(김홍인 서울종교친우회 퀘이커모임 서기)

“그는 항상 사람 대 사람 방식으로, 그의 노력에 대한 공을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일했습니다. 선생은 젊은 활동가들에게 훌륭한 멘토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추동과 격려를 기억할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그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었던 친구 이행우. 우리 속에 남아있는 그의 지혜를 그리워 할 것이니다.”(척 에써 미국 필라델피아 커뮤니티스쿨 이사, 퀘이커평화운동가)

“10대 처음 알게 된 그는 공공외교의 선구자였습니다.”(서혁교 미주동포전국연합 회장)

이행우 선생(왼쪽)

“선생은 사람을 스펙이 아니라 진정성으로 대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으실 때 ‘함석헌은 하나님 발길에 채여 살았고, 나는 함석헌 발길에 채여서 살았다’고 하며 함석헌과 운명적 결을 사신다고 고백했습니다.(중략) 선생님은 하신 일을 세상에 자랑하고 내보이지 않았습니다. 공과와 훈장에 미친 세상에서 말없이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스스로 다짐하셨지요. 주변에 숱한 활동가들이 민주화와 통일에 열정을 쏟다가 지치고 타락해버리나 선생님을 물 흐르듯 꾸준하고 일관되셨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하나님을 품고 사는 사람의 도리를 줄탁(?啄)으로 눈 뜨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발에 채인 사람들인 것을.”(이해학 겨레살림공동체 이사장)

이날 추도식은 윤선애 가수의 ‘부용산아’ 노래로 마감했다.

아들 이상연(앞줄 오른쪽 두번째)씨 등 유족들. 오른쪽은 이창복 전 국회의원

이행우 선생은 1931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해 서울대 수학과 졸업 후 해군사관학교·이리 남성고·서울동북고·숭문고·한양대에서 교편을 잡다 1968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60년 함석헌 등과 퀘이커서울모임을 창립했으며,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엔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를 통해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1980년대 이후엔 4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하며 북미관계 개선과 통일운동 등에 헌신했다.

이날 추도식엔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한명숙 전 총리, 조성우 전 민화협 상임의장,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 서승 리츠메이칸대 전 교수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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