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기념일, 남원 김주열 열사 묘소에 100세 노모 모시고 나타난 70대 목사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4·19혁명 57주년을 맞은 19일 낮.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데모에 참여했다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진 고 김주열(당시 17살) 열사의 남원시 금지면 용정리 묘소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나타났다. 4·19가 나던 해 이곳 금지중학교를 졸업한 한병옥 전 금지중 전 교장과 남원중학을 졸업한 이해학 성남 주민교회 원로목사 그리고 이 목사 모친 102세 한맹순 권사다.
언제 약속이나 해두었듯이 묘소를 찾은 이해학 목사는 동년배로 김주열과 금지중학교 동문인 한병옥 전 교장을 만난 것이다. 한병옥 전 교장은 정년퇴직후 김주열기념관 관리 등 ‘김주열 해설사’ 역할을 하고 있다.
김주열 열사는 1960년 남원 금지중학을 졸업하고 은행가가 될 꿈을 안고 이모가 살던 마산으로 가 마산상고에 응시했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던 중 3·15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참가했다가 죽음을 맞았다. 김주열의 주검은 한달 가까이 지난 4월11일 경찰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김주열 열사는 죽기 하루 전인 3월 14일 마산상업고등학교에 합격했으나 시위를 우려한 당국의 압력으로 발표가 늦춰지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제2차 마산시위와 이승만정권을 붕괴시킨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주열의 시신은 고향으로 와 4월13일 장례식과 함께 현재의 자리에 묻혔다. 비문은 4·19 당시 유진오 고려대 총장이 썼다. 후에 주민들이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에게 부탁했으나 “외할아버지(유진오 총장)가 쓴 비문을 손자가 어찌 고칠 일이냐”고 사양했다고 한다.
한편 이해학 목사는 4·19 데모에 참여해 머리 골절 중상을 입고 살아남아, 이후 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김주열 열사 묘소 정면에는 반야봉이 마주보이고, 백두대간 능선앞에는 성자 이현필님이 수도했던 견두봉이 일직선으로 보인다.
이해학 원로목사는 “살아남은 자의 몫을 다하지 못해 부끄럽기만 하다”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빚만 쌓여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