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뚝심의 ‘옥천소년’ 오성택, 사랑하는 세 여인 곁으로 가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 여인과의 아픈 이별을 겪었고, 그 아픔과 상실감을 온전하게 견뎌내야만 했다. 내가 15세 때 가장 많은 사랑을 주셨던 어머니를, 26세 때는 갓난쟁이 첫째 딸을, 81세 때는 56년 동안 부부로 살아온 아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세 여인을 땅속에 묻고 산에서 내려오며 너무 슬퍼 울고 또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그들을 만나러 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을 만나려면 이승의 가족들과 이별해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인생(人生)인지도 모르겠다.”
5일 87세를 일기로 별세한 오성택 선생이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옥천신문> 오한흥 대표의 부친인 오성택 선생은 자신의 말 그대로 세 여인을 만나러 떠났다. <아시아엔>은 오성택 선생을 추모하며 정지환 감사경영연구소 소장(전 여의도통신 대표기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을 옮겨 싣는다.<편집자>
[아시아엔=정지환 감사경영연구소 소장] 1988년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국민주’(國民株) <한겨레신문>이 등장하였고, 이에 영향을 받아 전국에서 지역신문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창간한 ‘군민주’(郡民株) <옥천신문>도 그 중의 하나였다.
오성택 선생은 처음부터 가장 가까이에서 옥천신문의 탄생, 위기, 성장의 전 과정을 지켜본 산증인이다.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은 옥천신문은 현재 전국 지역언론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변화에 대해 창간독자이기도 한 선생은 “뿌듯하고 자랑스럽다”는 소감을 밝힌 바 있다.
필자가 감사경영연구소 블로그에 쓴 스물네번째 은빛자서전 오성택 편 <사선(死線) 뚫고 생환(生還)한 뚝심의 옥천 소년>은 이렇게 전개된다.
충북 옥천읍 금구리에 사는 오성택씨는 옥천읍 중심가에서 60여년 동안 동신철물을 운영해왔다. 은빛자서전 1주년을 맞이해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식민지 소년의 설움
나는 1932년 옥천군 군북면 소정리에서 태어났다.
성실한 소작농이었던 아버지(오군보)와 어머니(황임순)는 슬하에 5남매를 두었다. 나는 위로 두 형님(두택, 인택)과 두 누님(음전, 인순)이 있는 막내로 태어났다. 지주 집에 대소사가 있으면 소작인과 가족들까지 일손을 보태야 했는데, 어머니도 가끔 지주 집 허드렛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보다 키가 컸던 어머니는 자식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억척스럽게 일하였다.
1938년 옥천읍 문정리로 이사를 나왔던 우리 가족은 5년 후에 장야리로 거처를 옮겼다. 내가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보다 앞선 1940년이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기에 식민지 소년의 설움을 톡톡히 겪어야 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한 장면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옥천읍 천주교 성당 마당은 읍내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그곳에서 종종 씨름판이 벌어지곤 했다. 나는 주로 일본 아이들과 씨름을 했는데, 대부분은 힘도 좋고 기술도 제법이었던 나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씨름판에 ‘오성택’이라는 내 이름 세 글자가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자랑할 것이 없었던 가난한 나에게는 큰 뿌듯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씨름을 가장 잘 하던 일본 아이와 한판 붙게 되었다. 어느새 일본 아이와 조선 아이들이 양쪽으로 갈려서 치열한 응원전을 펼쳤다. 탐색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김장 무를 뽑듯이 일본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운동장에 메어꽂았다. 열광하는 조선 아이들 앞으로 가서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포효했다.
바로 그때 일본인 담임선생이 나타났다. 그가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던 나를 향해 걸어오더니 냅다 소리를 질렀다.
“웃기는 어딜 웃어.”
그러더니 다짜고짜 내 뺨을 후려쳤다. 성인의 무차별 폭력에 공포감이 몰려오더니 갑자기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쓰러진 나는 본능적으로 두 팔로 머리를 감싸며 ‘다시는 씨름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나는 어린 나이에 ‘마음의 상처’와 ‘나라 잃은 설움’을 체험했다.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1945년 삼양초등학교가 생기면서 나는 학교를 옮겨 삼양초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삼양초 1회와 죽향초 35회 졸업생은 5학년 때까지 죽향초에서 함께 공부했다. 그래서 나중에 ‘삼죽회’라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죽향초 졸업생은 ‘죽삼회’라고 부른다).
■ 이승만과 신성모를 비판한 까닭
“성택아, 우리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너의 중학교 진학은 어렵겠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향학열에 불타던 막내를 좌절시킨 아버지의 통보에서 알 수 있듯이 원인은 가난이었다. 어쩔 수 없이 소년 나무꾼과 일꾼이 되어 부모님의 일손을 도우며 천자문을 익혔다.
19세가 되던 해인 1950년 초여름 전쟁이 났다. 내가 그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것은 형수와 아버지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아버님, 피난을 가야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전쟁이 났어요. 인민군이 쳐들어왔대요.”
그날부터 내 청춘은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형님을 따라 영동, 김천, 대구를 거쳐 청도까지 피난을 갔다. 다시 대구로 돌아왔을 무렵 나는 폭탄선언을 했다.
“형님, 군대에 지원해야겠어요.”
“아니 이놈아 너 죽으려고 환장했냐? 지금 전쟁으로 난리가 났는데 군대에 가겠다고?”
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총알받이가 될 수도 있는 전쟁터로 나 스스로 걸어서 들어갔다. 경찰서에서 입대 수속을 마치고 훈련소로 향했다. 엄중한 상황이라 훈련 기간은 1주일에 불과했다. 소총 방아쇠 몇 번 당겨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나는 7사단 5연대 3대대 화기소대 사수로 배치됐다. 군번은 ‘0120558’, 계급은 이등병. 하지만 군번줄과 계급장은 물론이고 군화조차 지급되지 않았다. 군대의 열악한 상황이 부패권력의 국정농단이 가져온 결과였음은 나중에야 알았다. 최전선에서 싸워야 하는, 그래서 ‘죽음의 조’로 불리던 1, 2, 3소대에 배치되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훈련소에서 교관들끼리 은밀하게 나누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쟤네들 나가면 곧바로 죽을 거니까 잘해줘라.”
실제로 우리는 곧바로 낙동강 전투에 투입됐는데, 거기 가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전투에서 젊은 병사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마치 타작을 마친 논바닥에 볏단이 나뒹구는 것처럼 낙동강 주변의 들판과 백사장에 시체가 즐비했다. 겉모습만 봐서는 아군과 적군이 구분되지 않았다. 군번줄이 없었던 전사자들이 보훈(報勳)의 대상이 되었을 리는 만무였을 터. 최근 사석에서 내가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은 정말 나쁜 놈들”이라고 비판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 바로 내 옆에 떨어져 터진 포탄
나는 전투에 투입된 지 이틀 만에 일등병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몇 차례의 전투에서 살아남자 ‘화기소대 사수 겸 분대장’이 되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반전의 계기로 삼은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우리 부대도 대구와 안동을 거쳐 북상해 38선을 넘었다. 38선을 넘으면서 나는 다시 하사로 승진했다. 입대 3개월도 안되어 초고속 진급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계급장은 없었다.
평양과 안주를 거쳐 덕천에 도달했을 무렵 우리 부대는 추위라는 복병과 만났다. 내복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만난 북방의 초겨울 날씨는 적군과 대치하기도 전에 우리의 전의를 빼앗아버렸다. 그리고 중공군 참전을 계기로 우리는 무조건 남쪽을 향해 후퇴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1950년 11월 5일 새벽 5시경 내 인생 최고의 위기의 순간이 닥쳐왔다. 순천을 거쳐 후퇴하다 개천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나는 왼쪽 무릎을 접은 상태로 총을 들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탄이 날아와 내 바로 옆에 떨어졌고, 파편 하나가 접혀 있던 왼쪽 허벅지와 종아리 사이를 관통하고 말았다. 뭔가가 내 몸을 스쳐가는 듯한 느낌, 잠시 후에 엄청난 출혈과 고통이 엄습하였다.
“오 하사가 당했다!”
귀청을 때리며 연이어 떨어지는 포탄 소리,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사람들, 고통을 호소하는 어린 병사들. 해가 뜨기 전의 짙은 어둠은 지옥을 연상케 했다. 나는 김일성대학에 설치된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아카징키’로 불리던 빨간색 소독약을 상처 난 곳에 바르고 출혈을 막기 위해 붕대로 칭칭 감아주는 것이 치료의 전부였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기막힌 상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텅 빈 병원에 나만 홀로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걸을 수 있는 사람만 데리고 모두 떠난 모양이었다. 부상자를 배려하지 않는 극한의 현실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담요를 몸에 감고 절룩거리며 밖으로 나와서 소리를 질렀다.
“저 좀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지나가던 행인들도 나의 절규를 외면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 내 앞에 자신의 등을 내밀었다. 그 사람의 등에 업혀서 평양역까지 가는 바람에 나는 간신히 남쪽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1951년 6월 15일 8369부대 통영파견대 하사로 명예제대를 했다. 허벅지와 종아리가 달라붙어 지팡이에 의지해 절룩거리며 다녀야 하는 상이군인이 되어 나는 세상에 나왔다.
■ 후손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재활의 시동을 건 곳은 청주 정양원이었다(정양원은 제대한 상이군인을 위하여 설치한 수용시설이었다). 나는 청주에서 고향 사람 세 명과 함께 생활하며 연초제조공장에 다녔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청주공고 야간학부에 등록하고 그렇게도 꿈꾸던 향학열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자 붙어 있던 허벅지와 종아리가 떨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나는 공장 배구부에 들어갔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배구를 한다는 것은 사실 무모한 일이었다. 계속 점프를 해야 하는 배구는 나의 신체적 조건과도 전혀 맞지 않았다. 점프를 할 때마다 통증도 따라왔다. 하지만 그렇게 1년이 흘렀을 무렵 다리가 펴지면서 걷기에 불편하지 않을 만큼 회복되었다. 이제 더 이상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고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한전에 다니다 사고를 당한 큰형님 가족을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작은형님에게 목수 일을 배워 생계를 꾸려갈 수 있게 된 나는 25세가 되던 해인 1956년 가을에 결혼했다. 배우자는 안남면 오대리 버들게에 살고 있던, 나보다 한 살 적은 조현이였다.
나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4남매를 얻었다. 장남 한흥, 장녀 한열, 차남 영배, 삼남 영준은 다시 9명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손주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불러본다. 정현, 각현, 지수, 지원, 지훈, 지범, 민지, 로지, 직. 너희들이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 여인과의 아픈 이별을 겪었고, 그 아픔과 상실감을 온전하게 견뎌내야만 했다. 내가 15세 때 가장 많은 사랑을 주셨던 어머니를, 26세 때는 갓난쟁이 첫째 딸을, 81세 때는 56년 동안 부부로 살아온 아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세 여인을 땅속에 묻고 산에서 내려오며 너무 슬퍼 울고 또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그들을 만나러 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을 만나려면 이승의 가족들과 이별해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인생(人生)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