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엔 오비추어리] 마지막 길 모친께 바치는 박노해 시인의 노래
박노해 시인 모친 김옥순 여사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박노해 시인은 이따금 내게 자신의 시집이나 사진집 등을 보내준다. 나는 그가 2010년 어느 가을날 120자 원고지에 싸인펜으로 써서 책 갈피에 넣어준 아홉자 ‘단문’이 맘에 든다. “꽃은 달려가지 않는다”
14일 낮 그의 모친이 별세했다는 소식이 왔다.
박기호 신부, 박노해 시인의 모친인 김옥순(金玉順, 이멜다, 향년 90세)님께서 13일 20시 20분 별세했습니다. 김옥순님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의장 신부를 지낸 장남 박기호 신부와 『노동의 새벽』의 시인이자 민주화 운동가인 차남 박노해 시인의 어머니로, 90년대 양심수 석방을 위한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활동 등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소리 없이 헌신해왔습니다. 빈소 : 여의도성모병원 장례식장 2호실(B1) 02-3779-1918 ?발인 : 16일(화) 오전 08시 장례미사 : 16일(화) 오전 10시 천주교 시흥동성당(서울 금천구, 미사 집전 염수정 추기경) 장지 : 경기도 포천시 천보묘원 유가족 : 아들 박기호(신부) 아들 박노해(시인) 딸 박선자·박기숙·박미숙(수녀) 며느리 김진주 사위 이신길 김기평
그가 함께 일하는 나눔문화의 임소희 ‘느린걸음’ 대표가 6월초 보내줘 단숨에 읽은 <참된 시작>에서 고인이 언급된 대목이 기억났다. ‘나도 어머니처럼’이란 시다.
나도 어머니처럼
왜 사느냐고 물으시면
죽지 못해 산다
나를 위해 산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누구를 위한 기도냐고 물으시면
자신이 잘되기 위해
무얼 얻기 위해 기도한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무얼 위해 그리 애쓰느냐 물으시면
내 한 몸 편하고 빛나기 위해
누가 알아주길 바래 땀 흘린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한번도 삶을 회의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 원망하지 않으며
몸져 아픈 날조차 이마 짚으며
당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한평생 어머니는 위해서, 위해서만
당신의 노동 당신의 기도
당신의 젖과 눈물을 온전히
이 못난 자식 위해 바쳐주셨다
그 아들인 나 역시 위해서, 위해서만
살고 죽겠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삶과 정성을 다 바쳐주신 내겐
그 사랑 내 몸에 가두어둘 권리는 없었다
끝내 죽음 앞에 세워져
죽음만은 피해가고 싶던 그 순간에도
나도 어머니처럼 성실하고 치열하게
온몸 바쳐 투쟁할 수밖에 다른 길은 없었다
아래 시 ‘거룩한 사랑’의 첫 연에 나오는 ‘형님’은 친형 박기호 신부다.
거룩한 사랑
-성(聖)은 피(血)와 능(能)이다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
서울서 고학하던 형님이 허약해져 내려오면
어머님은 애지중지 길러온 암탉을 잡으셨다
성호를 그은 뒤 손수 닭 모가지를 비틀고
칼로 피를 묻혀가며 맛난 닭죽을 끓이셨다
나는 칼질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떨면서 침을 꼴깔이면서 그 살생을 지켜보았다
서울 달동네 단칸방 시절에
우리는 김치를 담가 먹을 여유가 없었다
막일 다녀오신 어머님은 지친 그 몸으로
시장에 나가 잠깐 야채를 다듬어주고
시래깃감을 얻어와 김치를 담고 국을 끓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퍼런 배추 겉잎으로 만든 것보다
더 맛있는 김치와 국을 맛본 적이 없다
나는 어머님의 삶에서 눈물로 배웠다
사랑은
자기 손으로 피를 묻혀 보살펴야 한다는 걸
사랑은
가진 것이 없다고 무능해서는 안 된다는 걸
사랑은
자신의 피와 능과 눈물만큼 거룩한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