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새벽’ 박노해의 어머니께 바치는 시편··· ‘감사한 죄’ ‘의지하지 마라’

노동의새벽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 30주년 개정판

[아시아엔=편집국] 박노해 시인의 어머니(김옥순·90)가 13일 별세했다. 박노해 시인은 수배와 수감 중 자신의 시에 어머니를 종종 담았다. <아시아엔>은 시인의 어머니가 담긴 시 몇 편을 독자들께 소개한다.<편집자>

감사한 죄

새벽녘 팔순 어머니가 흐느끼신다

젊어서 홀몸이 되어 온갖 노동을 하며

다섯 자녀를 키워낸 장하신 어머니

눈도 귀도 어두워져 홀로 사는 어머니가

새벽기도 중에 나직이 흐느끼신다

 

나는 한평생 기도로 살아왔느니라

낯선서울땅에 올라와 노점상으로 쫓기고

여자 몸으로 공사판을 뛰어다니면서도

남보다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음에

늘 감사하며 기도했느니라

아비도 없이 가난 속에 연좌제에 묶인 내 새끼들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경우 바르게 자라나서

큰아들과 막내는 성직자로 하느님께 바치고

너희 내외는 민주 운동가로 나라에 바치고

나는 감사기도를 바치며 살아왔느니라

 

내 나이 팔십이 넘으니 오늘에야

내 숨은 죄가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거리에서 리어카 노점상을 하다 잡혀온

내 처지를 아는 단속반들이 나를 많이 봐주고

공사판 십장들이 몸 약한 나를 많이 배려해주고

파출부 일자리도 나는 끊이지 않았느니라

나는 어리석게도 그것에 감사만 하면서

긴 세월을 다 보내고 말았구나

 

다른 사람들이 단속반에 끌려가 벌금을 물고

일거리를 못 얻어 힘없이 돌아설 때도,

민주화 운동 하던 다른 어머니 아들딸들은

정권 교체가 돼서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도

사형을 받고도 몸 성히 살아서 돌아온

불쌍하고 장한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나는 바보처럼 감사기도만 바치고 살아왔구나

나는 감사한 죄를 짓고 살아왔구나

 

새벽녘 팔순 어머니가 흐느끼신다

묵주를 손에 쥐고 흐느끼신다

감사한 죄

감사한 죄

아아 감사한 죄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 수록

 

숟가락이 한 주먹이면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빚만 남은 어두운 집안에

보리 강냉이 잡곡밥을 차려온 어머니는

올망졸망 허기진 눈망울로 모여든

우리 어린 오남매에게

숟가락을 하나씩 나눠주며

말씀하시곤 했다

 

봐라, 숟가락이 한주먹이면

오복을 받는 사람이 한 명씩은 있는 거다

없는 살림에 식구 많다고 불평하지 말고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잘 나누며 살거라

함께 밥 먹는 사람 속에 복이 숨어 있고

누가 어떤 복을 타고났는지는 지금 아무도 모른단다

하느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다른 재능을 타고나게 해

모두에게 복을 고르게 내려 주시곤 한단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 수록

 

살아 돌아오너라

어머님은 6시간의 대수술을 받고 40여 분 만에 깨어나셨습니다

엄청난 수술 자국과 처참한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고통 가운데서도 어머님의 눈빛이 삶에 대한 의지를 담고 있어 다행이지요

어머님은 날마다 기도서와 묵주를 손에 꼭 쥐고 계십니다

무기징역 사는 당신 아들을 구해내기까지는

결코 눈 감을 수 없다는 사무친 의지이지요

당신과 내가 쫓기고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힐 때까지

80년대와 90년대의 그 험하고 가파른 역정을

가슴 타는 기도로 함께하시다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나 봅니다

다행히 어머님께서는 이제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나아지고 있습니다

뒷산 약수터까지 걷다 쉬다 하며 올라가 기도를 드린 다음,

기평아? 기평아? 기평아?

아들 이름을 크게 세 번 목메이게 부르신답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눈물겨운 장면인지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거리로 현장으로 감옥으로 떠돌면서

손주 하나 낳아드리지 못하고 병중에 돌보아드리지도 못하는

나와 당신의 처지가 ‘죄’ 그 자체로군요

아무 원망의 말씀도 하시지 않을수록 더욱 마음 아픕니다

 

맑은 다듬이 소리일까

새벽녘 어디선가 메아리쳐오는 소리

누군가 시리도록 내 이름 부르는 소리

기평아? 기평아? 기평아?

겨우내 아픈 내 언 몸 흔들어 깨워온 새벽 메아리 소리

남은 목숨을 다 바쳐 부르는 시린 호명 呼名 소리

기평아? 기평아? 기평아?

나 살아 있으마 너 살아 돌아오너라

언 땅에서 돌아오는 진달래처럼 돌아오너라

동굴에서 돌아오는 웅녀님처럼 돌아오너라

설산에서 돌아오는 부처님처럼 돌아오너라

광야에서 돌아오는 예수님처럼 돌아오너라

기평아? 기평아? 기평아?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사람만이 희망이다>에 수록

 

어머니의 꽃등불

어머니의 집은 언제나

높다란 산동네 아주 작은 집

언제나 맑은 가난이 흐르는

하늘 가까이에 집을 두시네

 

어머니의 집은 언제나

동네에서 가장 꽃이 많은 집

좁은 베란다에 촘촘히 놓은 화분에

동백꽃 난초 선인장 고추 분꽃을 키우시네

 

먼 길 떠나는 이 아들이 행여

어느 험한 곳에 길을 잃고 헤매일까봐

높고 쓸쓸하고 작은 산꼭대기 집에

환한꽃등불 켜 놓으시네

출처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의지하지 마라

엄니 난 배 고프다아

신발도 떨어지고 공책도 떨어지고

외갓집에 가서 쌀 좀 가져오자아

 

뙤약볕 아래 남의 밭 매는 엄니 곁에서

어린 나는 속도 없이 배고파 징징거렸다

훅훅 찌는 밭고랑은 매어도매어도 끝이 없고

흰 수건 쓰고 뚝뚝 땀방울 떨구는 엄니는

빠르게 호미손만 놀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긴 여름해가 갯벌 바다를 붉게 물들일 때쯤

엄니는 뽕나무 아래 잠든 나를 업어 샘터로 가 씻기고

날랜 손으로 밀린 집안 일을 단 속하고 저녁상을 차렸다

정신없이 밥을 먹는 나에게 엄니는 당신 밥을 덜어 주며

조용조용 그러나 단단하게 말씀하셨다

 

평아, 다시는 남의 쌀 가져오잔 말 꺼내지 말거라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의지하면 원망이 생기고 속이 물렁해져 사람 베리는 법이다

사지 육신 성하고 앞날이 창창한 사내가 자기 할 일을 버려두고

의지할 곳부터 찾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느님께만 의지하고 너 자신에게만 의지해라

 

많은 것을 겪고 많은 강을 건너고

아픈 시간들 속에서 때론 섭하고 때론 노하고

나도 모르게 탓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마다

그날 불볕아래 남의 밭매던 엄니의 묵묵한 호미손과

가난한 저녁밥상의 엄정한 말소리가 울려오곤 한다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에 의지하지 마라

오직 진리의 힘에만 의지하고(法燈明)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하라(我燈明)

출처 <겨울이 꽃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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