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호 신부·박노해 시인이 모친상 치르고 쓴 편지
지난 8월13일 90세를 일기로 별세한 고 김옥순 이멜다님의 유족들이 장례절차가 모두 끝난 뒤 조문객 및 지인들에게 감사인사를 보내왔다. 유족들은 김옥순님이 1988년 민주통일을 소망하며 노동해 모은 돈으로 산 <한겨레신문> 주식과 장례식 조의금을 비영리 사회운동단체?‘나눔문화’에 기부했다. <매거진N>은 감사인사를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여기 옮겨 싣는다.<편집자>
유족 감사인사
저희 어머님 故김옥순 이멜다의 가시는 길에?조의와 애도를 표해주심에 깊이 감사드리며?고마우신 뜻 새겨 사랑으로 보답하겠습니다?2016년 8월, 박기호 신부·박노해 시인 드립니다
어머님께 바치는 시
? ? ? ? ? ? ? ? ? ? ? ? ? ? ? ? ??박노해
간밤 꿈속에서 따악?
등짝을 때리는 죽비 한 대에
아픈 잠 깨어나니 그냥 눈물이 납니다
엄니!
느닷없이 울 엄니 생각이 나서
어린 내 종아리와 등짝을
따악따악 때리면서
정직해라
욕심내지 마라
남 못할 일 하지 마라
뜨거운 냉정함으로
부지깽이죽비 내리시던
장하신 울 엄니
사형받던 나 때문에 심장병에 쓰러지고
홀몸 빈손으로 기한 없는 옥바라지 하다
큰 수술까지 받고 병상에 쓸쓸히 누워
아른아른 저 강 건너 황톳길 내다보면서
나 죽으면 어쩌나 나 없으면 어쩌나
무기수 내 아들
마지막 심지를 올려 기도 바치실
불쌍한 울 엄니
분명코 정의라면 굽히지 말고
쓰러져쉴지언정 좌절하지 말아라
다 용서하고 아무도 탓하지 마라
겸손하게 기도하고 또 기도하거라
내 생각 말고 너는 너의 길을 가거라
따악?따악?
다시 부지깽이 죽비 내려주실
아, 손 힘마저 없이 다 바치고
가벼운 껍질만 남으신 울 엄니
홀로 누우신 당신 머리맡을
가만히 지켜드리고 싶은데
밤 깊은 적막 옥방
우두커니 벽 앞에 앉아서
그냥 목이 메인
엄니엄니 울 엄니 (시제:?부지깽이 죽비)
상례喪禮에 감사 드리며
8월 13일 여의도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첫새벽 미사를 집전한 유경촌 주교님. 장례 내내 쉼 없는 미사와 연도煉禱를 바쳐준 신부님과 수녀님, 신도분들. 8월 16일 고인이 35년간 다닌 서울 시흥동성당에서 장례 미사 주례를 집전한 염수정 추기경님과 주교님, 300여 사제들과 수도자, 수녀님들. 저마다 고인과의 인연을 추억하며 눈물짓고 웃음 짓던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사별한 지 53년 만에 땅속에서 남편을 다시 만난 어머니, 지상에서의 모든 노고를 내려놓고 편히 잠드소서.
김옥순 이멜다(1926.4.6-2016.8.13)의 유언
“나는 한평생 바치고, 바치고, 또 바치며 살아왔다.?큰아들과 막내딸은 하느님께 바치고 작은아들네는 나라에바치고 두딸은 이웃들 곁에 바치고 나는 기도를 바치고 살아왔다. 밥 잘 챙겨먹고 잠 좀 많이 자고 어디서 나 이쁘게 하고 다니고….바치고 다 바치고 빛나는 얼굴로 다시 만나자.”
김옥순 님이 걸어온 길
1926년 전남 고흥군 동강면에서 김해 김金가 부농 집안의 막내딸로 출생. 1944년 18세에 강직한 청년 박정묵朴正默과 결혼.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첫째 박선자 출산. 1948년 대대적인 민족·민주 인사와 민간인 학살로 이어진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쫓겨다니는 남편을 생각하며 한겨울에도 따뜻한 방에서 자지 않고 마당의 초막에서 기도하며 지냄.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둘째 박기호 출산. 1954년 셋째 박기숙 출산. 1956년 이승만에 맞서 민주당 신익희 대통령 후보와 장면 부통령 후보 선거운동에 나섬. 같은 해 가톨릭 세례를 받음.
1957년 넷째 박기평(필명 박노해) 출산. 4·19 혁명이 일어난 1960년 다섯째 박미숙 출산. 1963년 늦은 봄날, 남편과 사별. 1968년 생계를 위해 아이들을 고향에 두고 여수의 호남정유공장으로 떠남. 1972년 서울로 이주해 리어카 노점상, 버스 세차원 등 궂은 노동을 하며 자녀들을 교육시킴. 1984년 박노해 시인 시집 『노동의 새벽』 발간. 당시만 해도 아들이 박노해라는 사실을 몰랐음. 같은 해 큰아들 박기호 신학교 입학. 1985년 막내 박미숙, 수녀가 되다. “좋은 엄마가 못 되어주어 미안하다. 나의 소원을 풀어주어 고맙다.” 6·10 민주항쟁 이듬해인 1988년<한겨레신문> 창간 국민모금에 창간 주주로 참여함.
1991년 2월 7일 박기호 신부 사제 서품. 같은 해 3월 12일 박노해 시인 안기부에 체포, 8월 19일 사형 구형, 9월 9일 무기징역 선고. 12월 20일 며느리 김진주 4년형 선고. 1991년부터 양심수 석방을 위한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활동. 1993년 대선에서 패배한 김대중 前대통령이 영국으로 유학길을 떠날 때 공항으로 노란 장미꽃을 들고 찾아가 손을 부여잡고 송별. 1995년 4차례의 암수술을 받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어머니가 병환 중에 있는 박노해 시인이 하루빨리 가족 품으로 돌아와 새 출발을 하게 선처해 달라”고 김영삼 대통령에게 탄원 서신을 보냄.
1998년 박노해 시인이 김대중 정권의 8·15 특사로 7년 6개월 만에 석방되어 13년만에 아들과 재회함. 신앙과 기도 속에 살다가 2016년 8월 13일 향년 90의 나이로 53년만에 남편이 묻힌 곳에 함께 잠들었다.
박기호 신부의 감사편지
어머님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가운데, 기도해주시고위로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와 우정을 보냅니다. 생전에 어머님이 꽃을 좋아하고 가꾸셨는데 가시는 길에 꽃길을깔아주셔서 참 고마웠습니다. 제가 다 갚을 길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갚아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저는 2006년부터 단양에 ‘산 위의 마을’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몇 해 전, 어머님 댁을 찾아 하룻밤을 자고 나서는데 제게 조그만 봉지를 쥐여 주셨습니다. 단양 가는 버스에서 열어보니 먹기 좋게 잘라 둔 사과였습니다. 입에 넣고 달콤하게 씹는데, 울컥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왔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이었습니다.
부잣집 막내딸이었던 어머니는 18살에 가난한 남편에게 시집을 와서 집안을 일으켰고, 여순사건으로 도피생활을 하던 남편과 여러 도시를 전전했습니다. 다시 귀향한 이듬해인 37살에 부부 사별을 겪으셨습니다. 빚만 남기고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우리 5남매를 기르셨고 그 와중에 아들들로 인해 마음고생도 무척 많으셨습니다.
굽은 허리로 걸어서 성당에 가고 의자에 앉아 신공을 바치고, 이런저런 말씀을 하고 용돈을 넣어주기도 하던 어머니… 이제는 세월의 뒤안길에 희미하게 패인 궤적이 된 어머니의 청춘과 노년의 모든 삶이, 한 조각의 사과가 되어 불덩어리처럼 제 몸으로 꿀꺽 넘어왔던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빵은 그냥 밀로 된 빵일 뿐이지만, 그 빵을 나눌 때 우리는 “받아먹으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22~26) 하신 스승의 말씀과 삶과 죽음, 그의 살과 피와 현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행적과 십자가의 희생이 한 조각의 빵이 되어 몸으로 들어오듯이, 보잘것없는 한 조각 사과가 제게는 어머니의 거룩한 삶의 성사였습니다. “가다가 먹어라. 내 사랑이고 마음이다. 언제 불쑥 죽음을 맞을지, 행여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내 정성이고 내 몸이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어머님은 갈대 끝에 붙어 있는 매미 허물처럼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였습니다. 저희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어머님의 헌신을 세상 가운데 바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저희 가족을 위해서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박노해 시인의 감사편지
어둠에 싸인 별 가운데서 홀연 고아가 된 심정입니다. 어머님은 아무런 유산을 물려주지 못하고 떠나가셨습니다. 집 한 채, 땅 한 마지기, 적금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주셨습니다. 믿음의 푸른 산, 사랑의 고귀함, 헌신의 아름다움을 당신의 삶으로 심어 주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어 가난 속에 다섯 아이를 먹이고 기르며 갖은 병고와 노동을 치르고, 남편과 함께 일제와 분단의 밤길을 걷고, 아들과 함께 군사독재의 수배 감옥과 무기징역을 다 치러내셨습니다. 바치고 바치고 또 바치면서….
그녀는 내 인생에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녀로 인해 우리 집안은 고난 속에서도 늘 다정하고 애틋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고 그것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녀의 젊음과 눈물을 빨아먹고 우리 형제자매는 이렇게 자라났습니다. 이 풍진 세월 속에 우리를 위하여 소리 없이 헌신하며 살아온 그녀- 한 여인의 일생을 생각하면 울음이 북받치곤 했습니다. 한恨입니다. 내 어머니의 한,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와 선조들의 한, 그 깊은 역사적 ‘한恨의 사랑’이 나를 움직이는 동인인지도 모릅니다. 저도 어머니처럼 남은 생을 바치고, 또 바치고 살아가겠습니다.
작고 힘없고 가난했으나 어둠 속에 타오르는 불빛 같았던 한 여자, 선의와 헌신과 나눔의 일생을 살다 간 어머님의 마지막 길에 함께 연도를 보내주신 벗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내 손을 잡고 당부한 어머님의 유언을 당신을 위한 기도로 바칩니다.
“밥 잘 챙겨 먹고
잠 좀 많이 자고
이쁘게 하고 다니고…
아프지 말거라.”
사진설명
1956년 30세의 김옥순 님. 1966년 동강 공소 세례식 대모로. (왼쪽 네 번째)
1991년 안기부에 체포되어 고문받는박노해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 (왼쪽 세 번째) “진정으로 효도하는 길은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갖는 것이다.”
1991년 박기호 신부 사제 서품. 그녀 생에 가장 기쁜 날이었다. (오른쪽 첫 번째)
1995년, 무기수로 옥에 갇힌 아들에게 쓴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애타도록 기도해도 철창에 가로질러 빛을 못 본 박 시인이여. 못 견디게 괴로워서 외쳐봅니다. 춘추는 돌아가고 이 몸도 늙어지고… 그렇지만 울지는 않아요. 괴로움도 행복으로 알고 출소할 그날까지 웃으면서 기다릴래요.”(오른쪽 아래) 평생 손에서 놓지 않은 낡은 기도서.
1993년 박노해 시인의 옥바라지를 위해 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며.
1993년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는 농성과 단식. 민가협 활동 중 그녀는 ‘장기수’들을 생각하며 아들 사진을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오른쪽 아래) 故문익환 목사와.
1998년 박노해 시인 출소, 13년 만의 재회. 2001년 고향에서 찍은 첫 가족사진.
35년간 살아온 시흥동 연립주택에서. “어머니의 집은 언제나 높다란 산동네 작은 집. 맑은 가난이 흐르는 하늘 가까이에 집을 두시네. 어머니의 집은 언제나 동네에서 가장 꽃이 많은 집. 먼 길 떠나는 아들이 행여 어느 험한 곳에 길을 잃고 헤맬까 봐 산꼭대기 집에 환한 꽃등불 켜 놓으시네.” (박노해 시, ‘어머니의 꽃등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