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임원 출신이 ‘노동의 새벽’ 박노해 ‘나눔문화’ 15년째 후원하는 ‘사연’
[아시아엔=이호순 평창 ‘허브나라’ 사장, 전 삼성전자 계열사 사장] 80년대는 민주항쟁과 더불어 노동운동의 회오리바람도 거세어서 규모 있는 기업체들은 노동쟁의로 날을 지새웠다.
내 직장은 다행히(?) 그런 일이 없었지만, 그런 만큼 노조의 주요 타깃이어서 매일같이 간부들은 조기 출근하여 대책회의로 일과를 시작했다. 인사부문에서는 노동쟁의중인 기업체들의 노조 측 요구사항들을 빠짐없이 수집하여 우리 회사에는 해당사항이 없는지 검토해서 사원들의 불만을 사전에 해결하도록 조치했다. 회의 뒤에는 사원들과의 일대일 면담을 통해 애로사항과 불만사항을 파악하여 사전 조치하는 것이 주된 일과였다.
회의에서 빠짐없이 거론되는 것이 노동운동의 바이블로 알려진 <노동의 새벽>이었고, 이 불온서적(?)이 회사에 침투하지 않도록 방지하고 색출하는 것도 간부의 임무였다. 그렇기에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는 지긋지긋한 이름이었다.
그런 그를 귀농하고 몇 년 뒤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수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터키 대지진 피해(1999년 8월)를 돕기 위해 정신과 의사인 이시형 박사 등을 중심으로 민간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모은 위문금 전달과 이재민 위로를 위한 터키방문단에서 그를 만난 것이다. 당시 그는 무기수로 8년간 복역하고 특별사면으로 출소하여 소리 없이 지내고 있던 때였다. 조용한 일행이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2000년 11월, 그가 ‘사단법인 나눔문화’를 만들고 후원회원이 되어줄 것을 요청해서였다. 어떤 인연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난 11월로 나는 만 15년을 후원해 오고 있다. 나는 15주년기념 후원의 밤에서 후원회원 대표로 인사말을 하게 되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인사말을 했다.
“저는 다만 후원이 더 쉬워서 후원을 했을 뿐인데 소감을 말하라 하니 고민스럽습니다. 얼마 전 어떤 인터뷰에서 받은 질문이 생각나서 그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
‘귀농한지 23년이 됐는데 도시와 농촌생활이 어떻게 다른가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가 50년을 살았던 도시는 수직사회였습니다. 모든 것을 위로만 위로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아가는 것이었죠.
생산성을 높이고 효율을 높이고 실적을 쌓고 쌓아서, 그 실적이 자신의 존재인 걸로 착각하고, 남들에게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행운을 잡으려던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다 23년 전에 소박한 농사꾼이 되기 위해 귀농을 했습니다. 처음엔 도시인의 감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경험이 많았죠. 새로 이사 왔다고 콩도 갖다 주고 감자도 갖다 주고 그런 삶이었습니다. 가까운 이웃이라야 1km 이상 떨어져 있고 사람도 별로 없고 남 눈치 볼 일도 없는 참 평화롭고 살만한 곳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안 되어 내 신분(고향, 학벌, 전공, 직장, 직위 등)이 발가벗겨지고, 또 셋만 모이면 외지 사람이라고 왕따를 해요. 시간이 지난 후에 깨달은 것은, 도시가 ‘존재’를 위해서 살아가는 곳이라면, 시골은 사람과 사람, 이웃과 이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진 ‘관계’의 사회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관계 속에서 함께 있을 때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됐죠. 얼마 전 ‘한국의 경제 나이가 50살’이라는 뉴스가 나오더군요. 50살이면 장년을 넘어선 거죠. 그동안 치열하게 추진해온 ‘성장’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성숙’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성숙의 키워드는 ‘인내’와 ‘나눔’ 일 것입니다. 인내와 나눔을 바탕으로 남에게 강요하기보다 상대가 스스로 변화되는 것을 지켜보며, 내가 먼저 성숙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 나눔문화 15년의 의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앞으로 15년 후에도 이 자리에 서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