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 칼럼] “일본의 조선 교육···투자는 인색, 영향은 막대”
자유당은 일제를 물려받았다. 구한말에서 물려받지 못하고 일제로부터 물려받았다. 일본은 급격한 근대화를 위해 국가 자원과 노력을 군과 사범학교에 집중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포함하는 ‘고보’는 도에 하나를 만들었다. 해방 후 광주고보는 서중 일고가 되고 경북고보는 경북 중학교 경북고가 되었다. 얼마 후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합해졌다.
일본의 고등학교는 프랑스의 에꼴 노르말을 본뜬 학교로 일본과 조선에서 최고의 수재를 모았는데 1고에서 6고까지 만들었다. 그중 유명한 것은 동경의 1고, 교토(경도)의 3고였다. 민주투사로서 역사 철학서 <뜻으로 본 한국사>를 쓴 함석헌은 1고와 고등사범에 동시 합격한 수재였다. 한국에서 제국대학을 나온 사람도 적지만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은 더욱 적다.
대학은 동경, 경도, 동북, 북해도 등에 하나였다. 조선인 제대 졸업생은 몇명밖에 없었는데 법문학부를 나와 봐야 일제 관료가 되었다.
미군정 치하에서 이들과 미국에서 대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중책을 맡았다. 조선인 지사들이 보성전문, 연희전문을 만들어 해방 후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불교재단이 세운 혜화전문이 동국대가 되고 성균관이 성균관대가 되었다.
사관학교 출신도 적지 않았는데 구한말 군에서 일본군이 된 27기 김석원이 대선배 그룹에 속했다. 육대생은 일본군 내에서도 많지 않았는데 육대생을 낸다는 것은 연대의 명예였다.
조선인은 왕족인 영친왕과 홍사익뿐이다. 홍사익은 군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태평양전쟁에서 포로를 학대한 혐의로 미군에 잡혀 사형당했다. 어차피 패전한 군대에서 대우받을 리 없다. 살아있었다면 건군에 큰 힘이 되었을 존재가 아닐까 한다. 만주국이 생기자 만주군관학교에서 일본 육사로 몇 명이 유학을 왔는데 박정희는 그 중 하나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교육 투자는 인색하기 그지 없었지만 질은 높았다. 프러시아와 독일을 본받았기 때문이다. 박사는 미국과 같이 학문의 시작이 아니라 학계의 원로가 되었다.
와세다대 출신의 양주동 박사의 전설적 향약 저서인 <고가전요>(古歌全要)는 前期에 나온 것인데 박사가 된 것은 한참 후다. 그가 자칭 국보(國寶)라고 하는 이유다. 그는 영어, 독일어, 불어는 물론 희랍어, 라틴어로도 강독이 가능했다. 호남 갑부 집안에서 태어난 학생들의 여유였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외국어를 중시하는 것은 그것이 수단 이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독일어를 구사하지 못하고서 독일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양주동은 진정한 박사의 자질로서 폭넓은 지식과 시인으로서의 풍부한 감수성 그리고 냉철한 사유를 들었다.
일본이 교육에서 우리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쏟아져 들어온 박사들은 겸손해야 한다. 유럽의 신학문이 독일에서 일본을 거쳐 들여왔기 때문이다.
사학, 철학, 문학의 인문학은 시간이 필요하다. 밖에서 받아들이는 사회과학과 다르다. 정치학이 정치철학보다는 정치공학이 되고 있는 것은 우려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