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 칼럼] 발해사 연구, 러시아와 손잡는 것은?
발해는 중국 이전 중화민국에서 없어졌다. 중화민국 이전 청(淸)에서 없어졌다. 청 이전 명(明)에서도 없앴다. 고려 이후 조선에서 없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서 발해가 없어졌다. 김부식은 여기서부터 잘못되었다. 국호를 고구려를 이었다고 하여 고려라고 한 왕건과 달리 김부식이 나온 인종 이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관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발해의 국호는 진(振)이었다. 발해(渤海)는 당(唐)이 부른 호칭이었다. 5경은 동경, 서경, 중경, 상경, 남경으로 북한과 만주 전역에 펼쳐 있었으며 남경은 함남에 있었다. 10주도 이와 병행한다. 5경과 10주는 발해가 북한과 만주에 자리 잡은 것을 보여준다.
발해는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을 이끌고 세웠다. 중국에서는 이를 근거로 발해사를 중국사라고 한다. 고구려를 이은 것이 분명하므로 발해는 고구려의 연속이다. 말갈은 여진족이며 만주족이기도 하다. 아골타가 금(金)을 건국하고 거란을 축출하여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신채호는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묘청의 난의 실패가 ‘최대의 오점’이라 한다. 서경 천도가 고려 운세를 근본적으로 바꾸게 될 것으로 보았다. 묘청이 김부식에 의해 저지된 것을 비극의 단초로 본 것이다.
발해를 중국이 차지하여 발굴, 발견을 기대할 수 없지만 러시아 연해주가 된 이제 발굴과 연구가 진행될 수 있으므로 러시아의 기여를 기대한다. 혹자는 한 무제 4군 설치 주장부터 틀렸다고 한다. 4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진작부터 이설(異說)이 있어 왔는데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