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 칼럼] 일본 메이지유신과 김옥균의 갑신정변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의 4원훈은 사카모토 료마, 요시다 쇼인, 시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를 말한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1830년생인데 1868년 메이지유신을 주도하고 바로 조선을 공략해서 1875년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었다. 1890년 유럽을 돌아보고 와서 서구문물을 받아들였다. 김옥균은 1851년생인데 메이지유신에 감동을 받았으며 1884년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일본을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이처럼 일본과 한국의 개혁은 거의 동시에 출발했다. 갈라진 것은 한국의 고종은 지도자 역할을 하지 못했으나 일본 유신파는 성공했다. 고종은 임진왜란의 선조와 같다. 임진왜란 개시 직전 이순신은 거북선을 출현시켰다. 선조는 왜란이 터지자 궁을 버리고 의주로 도주했다. 성난 백성들은 경복궁을 불태웠다. 한산도 해전에서 이순신은 세계 해전 역사에 드문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해 해전 도조는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을 넬슨의 트라팔가 승전에 견주었다.
메이지유신에서 개혁파와 막부 실력자가 협조했다.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유신파와 대결하지 않고 협조했는데, 이것으로 메이지유신은 무혈혁명이 되었다. 막부에서 소수 항거가 있었으나 곧 제압되었다.
일본 성공의 요체는 교육이었다. 정직 실질 강건은 조선 선비의 경(敬)에서 온 것으로 메이지유신을 이룬 젊은이들의 모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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