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역사의 승자는?”…44년 전 12.12 당시 정승화·전두환·최규하 그리고

서울의 봄 포스터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10.26 당시 부마사태는 참혹했다.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은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부마사태에 대한 극단의 조치를 망언하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흥분해서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정승화 총장은 육본으로 복귀하여 김계원 비서실장에게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말을 듣고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김재규 체포를 지시한다. 헌병감은 김계원을 불러내어 체포한다. 참모총장이 괴한에 납치되었다고 보고 받은 육군본부는 북괴 무장공비 침투로 보고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대통령 시해현장에 있었다. 보안사에서 그를 수사하고자 한 것은 당연하다. 그는 적시에 사임했어야 한다. 적절한 시기는 최규하 대통령이 유신헌법으로 대통령이 된 12월 6일 직후다. 정승화는 이런 역사의식이 없었다. 이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12.12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12.12사태가 일어나던 날 합수본부장 전두환은 주요 인사를 경복궁에 모이도록 하고 참모총장 체포를 위한 대통령 재가를 받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갔다. 최규하 대통령은 노재현 국방장관의 배석을 요구했다. 노재현 장관은 피해버리고 없었다.

전두환 사령관이 당연히 대통령 재가를 받아오리라고 믿은 수사관은 정승화 체포를 위한 행동을 개시했다. 참모총장이 유고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복궁에 있던 장군들은 부대로 복귀하여 행동을 개시했다.

1군단장과 9사단장은 3군사령관 명령에 어긋나고, 3특전여단장은 특전사령관에 어긋나고, 수방사령관 명령을 받은 33단은 30단을 제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엄청난 혼란은 1공수특전단이 국방부를 제압함으로써 끝났다.

군인으로서 생각할 수도 없고, 다시 대뇌이기도 싫은 군사반란이었다.

5공화국은 박정희가 살았어도 어려웠을 경제문제를, 김재익 수석의 지혜로 해결하였다. 경제는 나아져서 88서울올림픽이라는 단군 이래 최대 행사를 치렀다. 노태우 대통령이 개막선언을 하였지만 서울올림픽이 전두환 치적의 종합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세계가 놀랐고 공산권 해체의 한 단초가 되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문민정권이 시작되자 5공청산이 시작되었다.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이 포승줄을 찬 희한한 모습을 세계는 보게 되었다. 한국의 발전에 경악하면서 질투나 시기로 어쩔 줄 모르던 중국이나 일본은 한껏 즐겼을 것이다.

1979년 이후 태어난 세대는 12.12사태를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이 먼 옛날에 일어난 일로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반백년 역사는 시사다. 시사문제를 아는 것은 17세 이상 어른에 필수다.

<서울의 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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