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떠나고 남은 전두환, 그의 입술을 주목한다”

1987년 6월10일 민정당 노태우 대선후보(왼쪽)와 손을 맞잡고 있는 전두환 대통령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6.29선언이 한국민주화의 효시였다”는 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민주화는 당연히 김영삼, 김대중의 몫이었다. 당시 살지 않았거나 어렸던 중년 이하 사람에는 특히 그러하다. 이는 역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호헌을 주장한 전두환의 4.13조치도 충격이었지만 이를 뒤집은 노태우의 6.29선언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대구· 경북이 노태우 정부의 지역 세력이라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에 권력을 잡은 관료, 장군 대부분이 이 지역 출신이었다. 신현확 국무총리가 대표적이다. 이들이 한국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었다.

박정희의 10월유신은 또 하나의 쿠데타였다. 긴급조치 이래 함석헌, 장준화, 문익환 등 재야인사는 감옥에 갔다. 김대중도 일본에서 납치되어 온 이래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미국으로 갔다.

12.12로 박정희 뒤를 이은 전두환은 유신정국의 연속이었다. 민주화열풍이 일어났지만 4.13호헌선언으로 정국은 숨이 막힐 때였다.

이때 전국에 시위가 이어졌다. 전두환은 계엄령 선포를 검토하였다. 그러나 고명승 보안사령관은 대대장, 연대장들이 반대한다는 군 인심을 전했다. 특히 부대를 출동시켜야 할 민병돈 특전사령관이 반대했다. 민병돈은 전두환 1공수특전단장 밑의 대대장을 지냈다. 둘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막역한 사이였다.

믿었던 민병돈이 반대하는 것을 보고 전두환은 뜻을 꺾었다. 대통령이 통수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믿었던 후배의 고집에 생각을 바꾼 것이다. 민병돈은 독특한 군인이었다. 생도 때 별명이 민따로였다. 추가 시험을 보러 혼자 교수부에 가면서도 생도대의 일부로서 행진하는 것처럼 제식동작을 했다. 독일어를 잘 해서 히틀러에 농락당한 독일 장교단 역사를 자세히 알았다.

민병돈은 집안이 민영환 충정공 집안이었는데 민비를 꼭 명성황후라고 불렀다. 이러한 집안 내력과 공부가 민병돈의 자긍심을 형성하고 군이 출동할 때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했을 것이다.

전두환에 대한 평가도 다시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가정을 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지만, 굳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가정을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0.26 당일 김재규가 육본으로 가지 않고 중앙정보부로 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중앙정보부는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을 제외하고는 못할 것이 없는 무소불위였다. 육본에서 정승화 참모총장이 김계원 비서실장 말을 듣고 김진기 헌병감에 체포를 지시했다, 체포된 김재규는 전두환의 보안사령부의 수사를 받았다.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정보 수사기관을 장악했다.

허겁지겁하던 김재규가 남산으로 거서 정국을 장악했으면 당시 부마사태 등 민주화운동은 어떻게 됐을까?

전두환의 행동은 전광석화와 같았다. 전두환은 박정희 밑에서 일찍부터 정치 감각을 익혔다. 청와대를 지키는 30대대장을 했고 공수특전단장으로서 서울의 5분대기조였다. 경호차장보에서 1사단장이 되고 소장 계급으로 중장이 하던 보안사령관이 되었으며 10.26 직후 김재규를 제압했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이었던 것은 12.12로 가는 첩경이었지만, 만일 김재규가 집권을 했다면 어떤 정국이 이어졌을까? 한국현대사에는 ‘가정법’을 적용해보면 여러 다른 결과가 튀어나올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견을 제대로 수용하지 않는 우리 현실에서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은 남는다.

노태우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남기고 떠났다. 그의 동지이자 후계자 전두환가 어떤 말을 남기고 눈을 감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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