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 외교안보 성과들···북방외교·남북기본합의서·818국방개혁·남북유엔동시가입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서 시민군 상황실장을 맡았던 박남선씨가 27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유족인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아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과 인사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89세로 별세했다. 이로써 또 한 세대가 막을 내렸다. 일제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30년대 초에 태어나 소학교를 일제 하에서, 중고교는 해방 후 혼란시절에 보내고, 1950년 6.25전쟁으로 청춘을 보냈으며 1960년대, 70년대에는 조국근대화의 주역으로 활약한 어렵게 산 세대다.

1988년 ‘88서울올림픽’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개회선언을 했다. 그러나 개회선언만 노대통령이 했을 뿐 올림픽 유치는 사실 5공의 공이었다. 1987년 6.29 민주화선언은 노태우를 한 순간에 영웅으로 만들었다. 후에 직선제 수용 등이 노태우 단독이 아니라 전두환과 함께 짠 드라마였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6.29 민주화선언은 민주화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다.

노태우의 북방정책으로 한국의 외교정책은 전적으로 달라졌다. 이승만과 박정희 이래의 외교정책이 전면 수정되어 중국 및 소련과 국교가 맺어졌다.

노태우 시절 남북관계 진전에 있어서도 획기적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가 이루어지고 남북 유엔동시가입이 성사됐다. 또 남북고위급회담이 정례화되었다.

그러나 운동권에 주체사상이 등장한 것은 오늘날까지 남북관계의 건전한 발전을 흐리게 하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의 818 국방개혁은 국방사에 획기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을 한 단계 높였다. 1994년 평시(정전) 작전통제권이 국군에 전환되었다. 그 전까지는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이자 한미연합사령관, 주한미군사령관이 행사해 왔다. 평시 작전통제권이 전환됨으로써 합참이 명실상부한 군령사령부가 되었다.

현재 문재인 정부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추진 중이나 주한미군은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정부가 한미공동의 능력 검증을 거쳐야 된다고 약속하였는데, 미국은 우리 능력이 충분치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북고교 출신인 그가 대통령에 오르자 대구·경북 출신 인사가 모여들었다. 정도가 심하여 T.K에 대한 비판이 심해졌다. 김영삼에 이르러선 경남 편중이 심해졌고 김대중에 이르러 호남 편중이 심해졌다.

3김시대 지역 편중은 우리 정치의 암이 되었다. 일류고교가 평준화된 것이 지역 편중을 완화한 점도 있으나 일류고는 지역 엘리트를 모으는 순기능도 있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성격도 대조적이었다. 전두환은 무리를 해서라도 필요한 것은 강행했다. “안 되면 되게 하라”가 5공의 모토였다. 노태우는 무리한 것은 가급적 피했다. 6공화국의 모토인 ‘보통사람의 정부’가 이를 대변해준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정책, 남북기본합의서, 818국방개혁 등은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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