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공과’와 역사평가의 ‘딜레마’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1983년 10월 3일 버마 아웅산사태가 일어났다. 전쟁으로 옮길 수 있었다. 1차대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북한 소행이라는 것을 당시 안기부 2차장이던 박세직이 밝혀냈다. 격분한 버마는 북한 국가승인을 취소했다. 단순히 국교단절이 아니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만행이었다. 1968년 청와대 기습을 일으킨 김일성은 “아시아 아프리카에 들인 공이 얼마나 큰데 하며” 처음엔 수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교장관, 김재익 경제수석을 포함 17명의 금쪽같은 인재들이 희생당했다.
인천공항이 만들어졌다. 박정희가 길러낸 인재들의 작품이었다. 인천공항이 건설되자 뒤이어 이명박 대통령이 평창 고속 전철을 놓고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에 디딤돌을 놨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나 2020년 도쿄올림픽은 한국의 1988년 서울올림픽이나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훨씬 못 미쳤다.
같은 시기 건립된 도쿄공항은 계속 지반이 침하되고 있다. 인천공항은 동북아를 대표하는 허브공항이다.
의료보험이 전두환 시절에 시작되었다. 이를 시작하고 정착시킨 사람은 김종인 보사부 장관이었다. 그는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의 손자로 신익희, 조병옥 등이 모여드는 수준에서 정치를 배웠다. 3김보다 훨씬 위였다.
의료보험은 한국이 선진국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구미에서는 의료비가 천정부지다. 동남아에서 관광객 등이 몰려 들어와 혜택을 받아볼까 애를 쓴다.
전두환은 방위산업을 조정했다.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하필 육사 수석 입학, 수석 졸업의 김성진 박사가 총대를 맺다. 연구소 인력 3000명이 1400명으로 줄었다. 한미 미사일 지침을 같이 추진하던 안동만 박사는 이때의 참담함을 생생히 증언한다.
이후 미사일 지침은 네 차례 개정을 거쳐 2021년 완전히 폐지되었다. 방위산업에 있어 미국의 통제를 받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오직 나로호와 같이 자력에 의한 연구 개발만이 해법이다.
5공에 들어와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중고등학생 두발, 복장 자율화를 했다. 지금 학생들은 밤 11시 반이면 통행금지에 걸리지 않으려 귀가를 재촉하고, 학생들은 짧게 머리를 깎아야 하는 것을 상상도 못할 것이다. 프로야구가 없는 사회를 생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집권초기의 10.27 법난도 기억해야 한다. 사회정화의 이름으로 적지 않은 인권유린이 있었다.
전두환은 안보회의를 조직화시켰는데 노태우에 와서 체계화되었다. 박정희는 청와대에서 안보정책을 혼자 구상했다. 이병형 장군 정도가 자주국방을 뒷받침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예 자주국방 개념과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은 미군이 다 해주는 것이라 한미관계만 잘 유지하면 되었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자주국방을 제대로 이어 받았다.
전두환은 육해공군 본부의 계룡대 시대를 열었다. 계룡대는 충청권 발전에 기폭제가 되었다. 세종시에 국회의사당이 들어선다고 한다. 육군본부 자리에는 노태우 대통령의 결심으로 전쟁기념관이 들어섰다. 이병형 장군이 초대 관장을 맡았다. 여기서 보면 6.25전쟁이 제한전쟁이 아니라 세계가 싸운 전쟁이라는 것을 역력히 알 수 있다.
79년 12.12와 80년 5.18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전두환의 과와 올림픽개최, 단임제 이행 등의 공과 함께 동시에 평가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