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유성룡·채제공···이런 공직자 어디 없소?
조선은 관료가 중요했다. 그중에도 삼정승이 중요하다. 세조는 육조가 정승을 거치지 않고 왕에게 보고하는 육조 직계제를 만들었다. 황희는 조선 초기 재상의 대표다. 갑을의 다툼을 중재하며 갑도 옳고 을도 옳다. 항의하는 병도 옳다는 일화는 황희의 원만함을 보여준다. 세종대왕의 치세는 황희, 맹사성 등의 유능한 정승과 같이 간다. 유성룡은 영의정이자 도체찰사로 임진왜란을 지휘했다. 오늘로 말하면 수상이자 총사령관인 셈이다. 이순신을 발탁한 것이 그였다. 유성룡은 이항복, 이원익 등과 더불어 임진왜란을 치러 내었다.
선조는 이들 정승에 비해 격이 많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이순신에 대한 홀대가 말해준다. 인목대비는 19세 나이로 51세 선조의 계비가 되었다. 그러니 선조의 아들 광해군이 나이가 더 많았다. 그는 임진왜란 중 분조를 이끌고 공이 많았다. 그러나 족보상으로는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어머니가 된다.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폐했다는 인조반정의 명분 폐모살제廢母殺弟는 이러한 배경을 가진 것이다. 조선의 선비는 明이 조선을 구하였다는 것만 중시하고 백성이 분기한 의병은 중요하지 않았다. 광주에서 분기한 의병장 김덕령이 역모에 몰려 장살杖殺당한 것이 이것을 말해준다. 광주의 충장로는 충장공 김덕령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가로이다.
1619년 3월 명明의 지원군으로 청淸과 교전을 피하던 강홍립이 투항했다. 광해군은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사르허전투에서 명은 이미 패했다. 바야흐로 대륙의 주인이 바뀌는 때였다. 고려 시대 요遼와 송宋의 대립을 판단하여 거란을 물리친 서희와 더불어 광해군은 역사에서 능란한 대전략을 구사한 드문 지도자였다. 광해군은 인목대비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함경도에서 분조分朝를 만들어 임진왜란을 이끌었다. 선조는 중국에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었다. 선조는 방계로서 세자교육을 받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 처족을 잘 골라서 임금의 우성優性이 이어지는 조선에서 그는 정통이 아니었다.
송시열은 인조반정 이후 봉림대군(효종)의 은사로서 숙종까지 4대에 걸쳐 치사했다. 그는 노론의 영수로서 신하 중에 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인데 성리학의 시조 주희를 맹신했다. 주희를 주자로 부르듯이 후세에 송시열은 송자로 불렸다. 김장생, 김집의 광산 김씨가 송시열의 뒤를 이어 성리학의 정통을 잇는다.
채제공은 정조 시대 정승이었다. 정약용 등과 더불어 조선 후기 중흥을 연다. 채제공은 주류인 서인이 아니라 남인의 영수였다. 천주학에 대해서도 배척 일변도가 아니었다. 11세의 어린 순조 시대에 박해가 시작된 것은 수렴청정을 한 대왕대비가 천주학을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이단이라고 배척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관료체제를 지탱하는 것은 정승과 더불어 이조전랑이 중요했다. 후임자를 전임자가 선정했는데 정승을 비롯해 누구도 관여하지 못했다.
조선에서 조祖가 붙는 것은 전란을 극복한 왕에 붙는다. 세조 외에 영조, 정조는 탁월하였기 때문이다. 황희, 류성룡, 채제공은 조선의 재상을 대표한다. 이를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 온고지溫故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