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 칼럼] 다시 발해 역사를 생각한다

국립중앙박물관 발해실

세종대왕이 만든 여연, 우예, 자성, 무창의 4군과 경흥, 경원, 온성, 종성, 회령, 부령 6진이 우리 강역을 확정했다. 백두산은 1956년 북한과 중국이 협의했으나 경계가 확정되지 않았다. 앞으로 중국과 장백산 유역을 확정해야 한다.

조선 말기에 일제가 두만강 이북의 간도를 넘겼는데 통일 후에 중국과 한다. 그런가 하면 백두산이 중국으로 표시된 지도가 기상청 지도에 나온다고 한다. 철없는 자들의 소행이든지 아니면 중국이 벌써 여기에 침투하여 조작하고 있는지 가려보아야 한다.

일본은 일제 강점기 조선을 넘어 만주와 몽고를 하나로 합쳐 진출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이 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만주국의 5족 협화(協和)를 추진했는데 5족은 일본인, 조선인, 만주인, 몽고인, 한인이었는데 한인은 몽고가 元으로 중국을 지배하던 때와 같았다.

조선인은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만주국 장교로도 채용했는데 강영훈, 박창암 등이 있으며, 우수자는 육군사관학교로 보냈는데 박정희, 이한림 등이 있다. 이들을 친일군인으로 치부하는 것은 유치하다. 친일논쟁은 해방직후 벌써 끝냈어야 한다.

일본군 대좌 출신의 김석원이 바로 군에 들어가지 않은 정도의 반성이면 족하다. 백선엽, 정일권 등 20년 후배들이 건군의 주춧돌이 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는 8기(특)으로 임관해서 1사단장으로 송악산 전투에 참여했다.

친일 군인 논쟁은 핀란드 국부 만넬하임 원수가 러시아제국 장군이었다고 기휘(忌諱)하는 것과 같다. 김석원의 포항전투는 백선엽의 다부동전투와 함께 나라를 구한 것이며, 이로써 유재흥의 영천 회전이 이루어진다.

중국은 발해 수도 상경성을 唐의 일부로 둔갑하고 있는데 발굴 작업을 철저히 감추고 있다. 발해가 연호를 쓴 것은 황제의 나라를 표방한 것은 분명한데, 唐과 일본에 보낸 국서와 답신에 명확히 나오는 것으로, 이것은 조작할 수 없다.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확인하는 다방면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행히 제3자로서 러시아가 있다. 중국이 러시아와 미국, 그리고 일본과 유럽으로 열려진 개방과 진실의 문은 닫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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