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 칼럼] 용문산 전투와 파로호

6·25전쟁 당시 중공군 수만명을 격파해 수장한 파로호 전투는 ‘현대판 살수대첩’이라고 불린다. 당시 대전과를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전장을 방문해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라는 휘호를 내렸다. 사진은 파로호 안보전시관에 전시된 당시 전투 모형.

6.25전쟁은 북한 남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공 입장에서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은 1950년 10월 5일 시작되었다. 유엔군의 북진에 의한 북한의 항복 직전, 스탈린이 모택동에 지령을 내렸고 중공은 이 지령에 따른 것이다.

유엔이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이후 중공은 국제사회에서 추방되었다가 1991년에야 유엔에 가입, 세계에 겨우 복귀했다.

국군이 전력을 발휘한 3대 전투는 △백선엽과 1사단 장병의 다부동 전투 △장도영과 6사단의 용문산 전투 △1952년 10월 김종오와 9사단의 백마고지 전투였다. 용문산 전투의 승리로 국군은 위상을 되찾았다. 그때까지 미군은 국군을 믿지 못했다. 미군 자체가 1950년 10월 운산과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 격멸당했다.

용문선 전투의 승전으로 수만의 중공군을 수장시킨 화천 저수지를 파로호(破擄湖)라고 한다. 을지문덕이 수 양제(隋 煬帝)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살수대첩을 떠올리게 한다.

수나라의 30만 대군 가운데 돌아간 병사가 2700명에 지나지 않았다. 화천저수지에 온 중국 관람객은 화천전투의 참상을 모른다. 그들에게 가혹한 침략의 벌을 제대로 알려주어야 한다.

용문산 전투의 성공은 2연대의 진지 고수로부터 시작된다. 장도영은 백선엽에 이어 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백마고지 전투의 김종오 장군도 당시 모두 30대였다.실패한 전투의 대표는 ‘3군단의 현리 전투’다. 교훈은 성공보다 실패한 전투에서 찾을 점이 많다.

현리 전투에서 군단이 해체되었다. 중공군 소수 분견대가 도로를 차단하고 있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3군단은 전군이 포위된 것으로 오인하고 공황에 빠진 것이다. 2차대전에서 발지전투(Battle of the Bulge)를 수행한 용장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군단장, 사단장들에 실망하여 3군단을 해체했다. 그는 1955년 나토군사령관이 되고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전설이었다.

유명한 전사연구가 홍성태 장군은 몇번이고 현리를 찾아 당시를 더듬었다. 지형을 직접 찾는 것이 당시를 회상하는 최상의 전사연구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유럽 전쟁을 확인하기 위해 30년전쟁에서 프러시아군의 로이텐전투 현장을 찾는다. 전쟁 현장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데 그치지 않고 발로 현장을 체험하는 것이다.

국군이 6.25전쟁에서 중공군을 물리친 빛나는 성과는 우리 젊은이에게 알리고 미국인들에게도 알려야 한다. 미군의 월남전 패배는 전장이 아니라 안방의 TV에서 진 것이며, 군인이 아니라 정치인들에 의해 패배한 것이다. 앞으로도 되풀이 될 수 있는 전쟁의 교훈이며 미국과 소련이 다 같이 아프간전쟁에서 얻은 뼈아픈 경험이다.

미국은 1950년 중공군에 당한 패배, 1970년대 월남전에서의 패배를 1991년 걸프전에서 갚았으나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실패를 되풀이하였다. 2009년 소말리마 전투에서 재발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전쟁은 보병에 의해 최종 결정된다는 지혜가 통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김관진 장관을 다시 기용한 것은 댜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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