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 칼럼] 고종의 갑오경장 ‘탄압’과 우크라 침공 푸틴의 ‘패착’
임진왜란은 국가운영상 비상체제를 요구하였는데 의정부와 군부가 합쳐 설치된 것이 비변사備變司인데 줄여서 비국備局이라고도 한다. 비변사가 움직인 것이 조선의 실상이었다. 유성룡 등이 주로 토의한 곳이 비변사였다. 병자호란 당시 강홍립 항복의 시비를 가린 곳도 이곳이었다.
기록에 남아 있는 발언은 하나하나 검토해야 한다. 그래야 당시 엘리트의 실상을 알 수 있다. 비변사는 고종 때에 대원군이 폐지하고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친일파정권에 의해 군국기무처가 만들어졌다. 그후 3개월 동안 심의안건을 통과시키고 고종이 폐지했다. 주요 안건은 관제를 개혁하여 국왕의 전제적인 권한을 폐지하고 내각 권한을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갑오경장은 청군에 의해 실패한 삼일천하三日天下였다. 고종이 김옥균을 암살하고 시신을 능지처참陵遲處斬한 것은 낙후落後된 조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본은 김옥균을 일본에 데려가 근대화된 문물을 보여주었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 일본에 국권이 침탈당하기 전 우리가 독자적으로 마지막으로 행한 것이 1894년 갑오경장이다. 1910년 한일병탄은 요식절차에 불과했다. 갑오경장에 우리가 근세에 이룩하고자 한 이상이 담겨있다. 이승만, 서재필, 김윤식, 박영효 등은 외국으로 망명했다. 때문에 우리의 근대화 연구는 이때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선 근대화는 일본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 등에 의한 도막파(倒幕派, 막부 반대세력)에 의해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것이 1868년이다. 1853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왔다. 그동안 개혁을 하고 조선을 침략하는 수준에 오른 것이다. 강화도조약이 1876년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책략이 주로 작용했다. 그가 고종을 두고 농락한 것이다.
1909년 안중근이 그를 포살한 것은 민족의 울분을 토해낸 것이다. 상해의 윤봉길 의사와 더불어 한국은행 발행 대한민국 지폐에 등장해 국민들이 기려야 한다.
근래 이토가 일본에서 다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뜻 있는 일본인이라면 한일친선을 위해 이는 삼가야 한다. 육군의 오야마 이와오, 해군의 도고 헤이하치로 등 내세울 만한 장군도 많이 있잖은가? 한일간은 다리를 놓아 국민들이 오가면서 직접 보고 부딪쳐야 한다. 그래야 소수의 정치인, 언론인이 한일관계를 무너뜨리는 교란 책동을 멈출 수 있다.
한편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인도적 지원 외에 무기를 지원하자 러시아가 한국을 교전국에 집어넣고 적대행위로 규정했다. 러시아가 한국을 제어할 만한 무슨 능력이 있는 있는가?
혹시 러시아 원유 구매에 영향을 줄 지도 모른다. 러시아는 원유대금으로 달러를 더 필요로 한다. 영국, 독일 등 유럽의 러시아에 대한 압박은 날로 거세지고 있다. 어떤 면에서 우크라이나를 막무가내로 침공한 푸틴의 판단력은 가소롭다고나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