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경장 주역 김옥균을 다시 생각한다
김옥균 등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월탄 박종화의 소설 정도로 그려져 있다. 오히려 일본 개화파를 소재로 한 작품을 번역한 것은 많다. 일본 개화파는 거의 무혈로 막부를 무너뜨렸다.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867년 순순히 막부를 넘겨 명치유신이 무혈로 이루어졌다.
요시노부가 무혈로 대정 봉환(大政奉還, 1867년 10월 14일 일본의 에도(江戶) 막부시대 말기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1837~1913)가 일왕(日王)에게 국가통치권을 돌려준 사건)을 하기에는 그와 뜻을 같이하고 도운 애국자들이 있었다. 가쓰 가이슈가 대표다. 뒤에는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이 있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쓰 가이슈 등은 연배나 경험에서 조선의 개화파와 별 차이가 지지 않았다. 청일전쟁을 시작할 때 일본군은 성환에서 첫 승리했는데 일본 전국이 환호했다. 일본은 러일전쟁 직전 영일동맹을 성립시켰는데 여기에는 북청사변에서 일본 무관의 용전이 영국에 감명을 준 것이 영향을 미쳤다.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총리를 지내고 청일전쟁을 이겼으며 요동반도와 타이완을 할양받고 강화교섭에서 청의 총리 이홍장李鴻章을 상대해서 배상금으로 3억량을 받아냈다. 그런데 이홍장을 저격한 청년 때문에 국제여론이 비등하자 1억량을 감할 수밖에 없었다. 2억량은 일본 정부 예산 4년분에 상당하는 거금으로 이 돈 20%가 야하타제철소 건설에 사용되었는데 일본 중공업 건설의 기반이 되었다. 이는 한국이 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제철소를 건설한 것과 같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사실상 국권을 잃었다. 1910년의 한일병탄은 요식 절차에 불과했다. 민영환이 을사늑약을 못 막아 용서를 빈다면서 생을 마감하자 고종이 충정공의 시호를 내렸는데 그의 자진自盡은 민씨 가문의 체통을 살린 것에 불과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기개에 있어 메이지유신의 이토 히로부미에 못지않았다. 고종은 요시노부와 너무 차이가 났다. 조선이 멸망하게 된 이유를 하나만 찾으라고 한다면 이를 들 수 있다. 고종에 영향을 준 대원군과 민비도 이 맥락에서 검토해야 한다. 임진왜란의 실패를 선조 임금에서 찾는 것과 같다. 3.1운동 이후 고종의 망명 가능성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일본의 철저한 감시에 탓을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아무런 시도도 찾아볼 수 없다.
영친왕도 일본에 온 조선 출신 장교에 별 감화나 동요를 주지 못했다. 대선배인 김석원 대좌도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고려에 비해 조선은 너무 볼품없이 스러져 갔다. 오늘날 고려와 조선의 종말에 대해 다시 깊이 생각해볼 점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