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 현충원, 매헌기념관 그리고 윤봉길 의사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현충원은 지성소(至聖所)다. 서울 현충원 제단에 새겨져 있는 노산 이은상의 헌사를 되새겨 보자.
이곳은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미국에서는 재향군인회의 영향력이 크다. 링컨기념관 옆에 헌정된 참전용사상에 새겨진 Freedom is not free가 상징한다.
강남에는 서울시민의 숲이 있고 그 안에 매헌기념관(梅軒紀念館)이 있다. 서울의 숲은 박정희 대통령이 강남을 개발하며 만들기 시작했는데 전두환과 노태우가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에 맞추어 조성했다. 위치와 면적으로 보아 서울의 센트럴파크나 하이드파크라고 하여 손색이 없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동양천지를 흔든 이후 1910년 한일합방 이래 윤봉길 의거만큼 세계를 진동시킨 사건은 없다. 1919년 기미독립만세로 조선이 살아 있음을 과시했다면 1932년 상해 홍코우공원(虹口公園)에서의 윤봉길의 거사는 세계를 뒤흔들었다.
국제연맹은 1931년 만주사변에서도 속수무책이었지만 1932년 상해사변에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미국이 빠진 국제연맹은 허우대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제국이었다. 일본은 1차대전의 전승국으로 영국, 미국, 프랑스와 함께 열강의 하나였다. 일본군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였다.
일본은 전승을 축하하고 천황 히로히토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天章節) 행사를 가졌는데 윤봉길의 폭탄 투척으로 행사장은 파탄(破綻) 되었다. 상해 파견군 사령관이 폭살되고 많은 고관이 상해를 입었다.
주중공사 시게미쓰는 이때의 부상으로 다리를 절면서 1945년 9월 미주리함에서 외상으로 일본 정부를 대표하여 항복문서에 서명하게 된다.
장개석은 중국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장거를 조선 청년이 이루었다고 찬탄했다. 그때까지 별 신경 쓰지 않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원하는 동기가 되었다. 중국을 전전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재정지원을 시작하고 군관학교에 조선 청년을 입교시켰다.
1946년 백범은 윤봉길 의사 유해를 모셔 이봉창 의사 등과 함께 효창공원에 모셨다. 조국이 독립되어 가장 먼저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 총통은 처칠과 스탈린을 설득하여 한국을 ‘적절한 때에’(in due course) 독립시키기로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의 카이로선언을 수용키로 하여 조선은 해방되었다.
신채호는 서경(西京) 천도를 주장한 묘청의 난이 실패한 것을 조선 일천년 역사의 최대 사건이라고 불렀다. 일본에 나라를 잃은 후 많은 독립지사가 있지만, 윤봉길 의사의 장거는 독립운동 사상 최대의 위업이라고 할 만하다.
당시 윤봉길은 25세였는데 의거에 나서며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의 각오를 남겼다. 총을 맞으며 한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일본은 윤봉길의 유해를 평장(平葬)하여 그 위를 밟고 지나가게 만들었다. 저들에게는 윤봉길이 철천지원수(徹天之怨?)겠지만, 일본인이 졸장부임을 세계에 광고한 것에 불과했다.
우리는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교육현장으로 가장 먼저 참배를 하게 함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현충사와 함께 국민교육의 현장으로 되살려야 한다. 이것이 혼이 살아있는 국가다.